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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 36:4-10)


망령된 행동을 삼가십시오.



본문에 보면 앗수르 왕의 장수인 랍사게가

유다의 3명의 사절에서 항복을 요구하는 말이 나옵니다.



랍사게는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라며

앗수르의 막강한 무력 앞에서도 항복을 거부하는

유다에 대해 경멸감을 드러냅니다(4절).



또한 히스가야 왕의 계략과 용맹을 ‘입술에 붙은 말’,

즉 전쟁에 아무 쓸모도 없는 말재주로 치부합니다(5절).

그래서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6절).

비록 이방인의 말이지만 맞는 말입니다.



사람을 믿어주되 의존적인 믿음은 가지지 마십시오.

사람을 의지하면 결국 사단에게 당합니다.



당시 히스가야는 유다의 모든 산당들을 헐고

예루살렘 성소에서만 예배하게 했습니다.

그런 개혁조치가 랍사게의 눈에는

신들의 수효를 제한하는 치명적인 실수로 보였습니다.



당시 앗수르인들은 신을 숭배하는 제단이 많을수록

나라의 힘도 강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예배 장소를 한 곳으로 감소시킨 히스가야의 행위는

나라의 힘을 크게 약화시키는 행위라고 여기고 마음껏 조롱했습니다(7절).

실제로 앗수르의 군사력과 유다의 군사력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8절).



그래서 랍사게는 유다가 앗수르 왕은 커녕

앗수르 왕의 부하 한 사람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조롱하며

애굽의 도움을 얻어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습니다(10절).

즉 자신이 유다를 멸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뜻을 내세워서 유다 백성들의 사기를

꺾으려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방인의 입술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어 일컬어지는 상황을

그냥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성도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어 일컬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름은 단순한 명칭만이 아니고 존재의 현존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제 자신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이름이 부끄럽게 되지 않게 하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십시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어떤 귀신들린 여종이 점을 치는데, 점을 꽤 잘 쳤습니다.

그 여종이 바울 일행을 좇아오면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칭찬을 듣고 괴로워했습니다.



사람들은 칭찬을 무조건 좋아합니다.

그러나 칭찬이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칭찬하는 것은 세워주려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겉으로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입니다.



가끔 믿음도 없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우며

기도하고 능력을 행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입니다.



구약 시대에 일반 제사장들이

허락 없이 지성소에 들어서면

들어서는 즉시 죽어 넘어졌습니다.



심지어는 대제사장도 대 속죄일이 아닌 때에

피가 없이 들어가면 역시 즉시 죽어 넘어졌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스스로 지키는 분입니다.



죄인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없으며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하고 얻을 수 있는 복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하는

버릇없는 아이처럼 되지 마십시오.



버릇없는 아이는 잘해주는 사람에게

기어오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잘해주면 더 감사한 마음으로 예를 갖추어야 하는데

방종으로 흐르고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안타까운 모습이 종종 보입니다.



왜 오늘날 은혜가 옛날보다 떨어졌다고 느낍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열린 예배도 중요하지만 열린 예배가

‘너무 열린 예배’가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역이용하여 방종으로 흐르면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지 않고,

그런 방종 속에서는 하나님의 진정한 복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철이 들지 않은 자녀는 구원은 받지만

그에게 안심하고 하나님의 기업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오직 철이 든 자녀만이 구원과 더불어

하나님이 하나님의 기업을 풍성하게 허락하십니다.



결국 경외하는 신앙이 차원 높은 축복을 예비합니다.

사랑은 경외하는 마음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글쓴이

묵상

날짜

2011-10-29 12:5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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