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관계적이며 수직적인 예배로 회복시키자~!!]**

**[개신교는 예배를 변질시키고 말았다]**
본인은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 김인찬 목사입니다.

*예배란 인간이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 위해서 몸으로 표현하면서 드리는 신앙행위이다.

예배에서도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성령]의 관계가 설정된다.
이러한 관계는 철저히 인간은 아래에서 드리고 하나님은 위에서 받으시는 수직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그 안에서 예배를 올리는 역할은 성령이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그 관계를 수직적으로 살펴보고 인간이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관계설정
(1)하나님: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최종적으로 받으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며 사람의 모든 마음을 성령으로 아신다. 예배도 진실한 예배만을 참으로 기뻐 받으신다. 거짓된 예배에 대해서는 받으시지 않으신다. 이렇게 예배에 대해서 판단하시면서 받으시는 우리의 영적 아버지이시다.

(2)성령 : 인간이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늘의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역할은 성령이 감당하신다. 사람의 마음을 성령이 아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의 정직한 마음의 예배를 위로 올리는 역할을 감당하신다. 정직한 마음의 예배를 돕고 그 예배를 하늘로 올리지만은 거짓된 예배에 대해서는 성령이 거부하듯이 하나님도 등을 돌리신다. 결국 하나님께서도 이런 거짓된 예배는 받으시지 않으신다.

(3)인간 : 인간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적으로 예배를 통해서 나아간다. 마음을 드리는 행위가 몸으로 나타난 것이 예배의 모습이다. 마음의 정성이 몸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 모든 마음의 상태대로 성령은 역사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철저히 드리는 입장이다. 예배는 사람과 사람의 행위가 아닌 수직적인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다.

수직적 예배는 인간의 영혼과 몸으로 드리는 전인적인 예배가 땅에서 하늘로 드려지는 것이다. 영의 깊은 마음을 혼을 통해서 육체가 동원되어 보이는 예배로 표현되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과 함께 하면서 그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 올리시는 것이다. 신자의 영의 깊은 마음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므로 성령이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신다.

이렇게 예배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드려지는 원리가 적용되어진다.
그 원리는 [사람의 영]과 [성령]과 [하나님(영)]의 관계가 형성된다.(영으로 교통하는 예배)
이렇게 예배는 마음의 깊은 영으로 드리는 것이며 성령은 그 영으로 드리는 마음의 예배를 영으로 계시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영적예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 예배는 성령과 진리 가운데서 드릴 때에만 받으시는 것이다. 외적인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외적인 것은 마음의 상태대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이렇게 사람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다. 서로 분리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외적인 것이 중심이 되면서 정작 내적인 것이 상실되어 버리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사람의 영의 생각이 진실하면 그 보이는 행동도 그렇게 나타나야 마땅한 것이다.
사람의 영혼과 육체는 통일된 관계로 나타나야 한다. 몸과 마음이 따로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과 같다. 물론 내영이 거짓된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동시에 행위로는 정직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해도 성령은 그러한 거짓된 마음을 미리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러한 예배는 올리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책망이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예배는 수직적인 삼각관계가 매우 약화되었다.(하나님, 성령, 성도)
신학이 수평적인 신학과 정치가 강조되어 관계적인 진리를 약화시켰듯이 예배도 그와 같은 수평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된 것이다. 예배의 특징은 신과 인간의 관계와 그리고 수직적인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참 예배의 특징인 [관계의 파괴]와 [수직적인 형태]의 상실은 오늘날의 예배가 철저히 인간중심적인 예배로 바뀌었다는 것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관계의 파괴는 하나님과 성령과 인간의 삼각관계에서 드리는 것을 무너뜨린 것이다. 예배의 수직적인 모습은 예배가 수직적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되어야 정상적인 예배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먼저 관계의 약화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오늘날 예배의 모습은 인간과 인간의 문화적 행사가 중심이 되어 예배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중심의 예배가 현대교회의 예배이다. 그러나 참 예배는 사실 영적인 것이다.

예배는 외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사실 영적으로 보면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하늘에 계시는 영이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영적인 신앙행위이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인 예배가 우리의 몸을 통해서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배는 외적인 예배의 모습이 내적인 관계를 철저히 무시하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내적인 마음의 예배가 온전히 정립되지 못한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외적인 것을 통해서 내적인 것을 지적하려고 한다. 물론 내적인 내용이 올바로 세워지길 바라는 것에서 외적인 것을 통해서 지적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배관계는 땅에 있는 성도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한 관계이다. 그러므로 수직적인 관계와 그 모습을 분명히 취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것은 언어나 행동도 그렇게 나타나야 되며 그 올리는 형식도 수직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언어도 수직적으로 나타나야 되며 행동도 그렇다는 것이다.

오늘날 예배의 시작은 보통 묵도로써 시작한다.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한 마음의 준비인 것이다. 그 시간은 마음을 모으는 시간이며 예배를 참으로 드리기 위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 이 묵도를 마치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으로만 생각하면 결코 안 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관계되면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묵도시간을 좀더 길게 가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너무 짧은 시간은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의자에 버젓이 앉아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 드리는 것들도 사실상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 성도들 앞에 계시는 것과 같이 경건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예배 자들의 참 자세일 것이다. 성도는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고 몸도 그렇게 나타나야 마땅한 것이다.

결국 예배의 시작부터 편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드린다는 것과 동떨어진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모두 지켜보고 계신다면 우리의 자세는 매우 경건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사람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높은 사람이나 혹은 존경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예의를 잘 갖춘다. 그런 모습이 진정한 예를 갖추는 모습일 것이다.

이런 관계가 가능한 것은 귀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내 앞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대통령이 나와 함께 하지 않고 청와대에 있는데 내가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예의를 갖춘다면 이상한 모습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떨어져 있을 때와 내 앞에 관계될 때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예배는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므로 하나님께 직접 올라간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이다.

성령으로 드려지는 것이므로 우리의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모습으로 나타나야한다.
그럼 어떻게 드려야하는가? 경건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 경건한 마음과 모습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편히 누워서 예배드릴 수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위를 향한 수직적인 모습으로 예배가 드려지게 되는 것이다. 찬송과 기도의 외적인 모습도 편히 앉아서 행하는 것보다 서서하늘을 향하는 수직적인 자세가 매우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땅을 보면서 눈을 감고 기도하는 습관적이 행동보다는 하늘을 향해서 혹은 위를 향해서 우리가 나아간다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때때로는 필요한 부분이다. 왜 사람들이 땅을 보고 예배하는 습관을 고집하는가? 그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높으신 분께는 인사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은 하늘에 계신다. 예수님도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다. 물론 이러한 기도의 모습은 마음으로 하늘에 계시는 분을 찾는 것이 그대로 표현되는 것이다. 습관적인 것보다 실재적인 모습이 적용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그런데 왜 오늘날 예배의 모습이 수직적인 관계로 드러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땅에도 계시고 동시에 하늘에도 계신다는 사상에 의해서 수직적인 관계가 현저히 약회된 것이다. 즉 신은 어디에서나 무소부재 하신다는 사상에 의해서 사람들은 두 세계로 분리되는 것을 스스로 포기했던 것이다.

그 결과 땅에서 하늘을 향해 취하는 기도나 예배의 모습은 매우 어색하게 느껴진 것이다. 하늘과 땅의 일체세계관에 의해서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는 예배가 오늘날 예배의 모습이다. 성도가 땅에서 예배를 드리게 될 때에 하늘로 올려드리는 모습으로 잘 표현되지 않는 이유는 그러한 세계관의 결여에서 오는 문제일 것이다.

이제 그 정상적인 모습을 회복하려면 우리는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는 수직적인 관계가 정상적인 사고일 것이다. 성경은 결코 두 세계관을 일체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는 마치 신하가 왕 앞에서 보고하는 모습과 같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비천한 종과 같은 위치이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께 어떠한 모습을 취해야 하는가? 당연히 경건한 자세로 나타나야 마땅하다.

과거 엄격한 왕정정치의 시대에서는 상하의 관계가 분명했듯이 그 당시의 예배도 그와 같이 수직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평등사회와 민주주의 사상에 의해서 수직적인 예배 대신 민주주의 영향에 의해서 예배가 수평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 지금이 왕정정치의 시대라면 현재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습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냐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하나님은 영적인 하나님이지지만 우리는 보이는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결코 분리되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배고프면 밥을 먹는다.
이와 같이 우리 영혼의 갈급함과 소원은 육체의 모습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로 올리는 예배의 모습은 매우 경건한 자세로 드려져야 마땅할 것이다.
신앙고백도 서서해야하며 위를 향하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이다. 공동기도도 고개를 숙이고 하는 것보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를 찾는 모습이 정상적일 것이다. 기도합시다! 말하고 음악이 나오면서 모두 묵념하는 모습은 위를 향한 자세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신경의 고백도 마치 주문 외우듯이 하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을 향한 마음의 자세를 취하고 한 소절씩 천천히 고백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임을 인식해야할 것이다. 단순히 글을 읽는 형태가 아닌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정성스런 신앙고백이 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외식보다는 진심 있는 신앙고백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개신교의 예배는 마치 세상 행사의 식순들과 같이 진행되고 있다. 예배는 세상에서 행하는 행사의 식순과는 그 모습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배는 하늘과 땅에서 이루어지는 영적인 신성한 만남과 교통이다. 그런 행위가 요즘은 세상에서 유행하는 결혼식이나 장례식과 같이 변질되고 말았다. 참 예배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 예배의 형식도 그렇게 수직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예배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다.
다양한 교회의 예배를 살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위로 올리는 예배의 실패는 결혼예배, 장례예배, 돌잔치 예배, 회갑예배, 가정예배, 주일예배, 삼일예배 등등 모두 모아서 보면 수직적이 예배의 모습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결국 행사와 예배가 잘 구분이 안 되는 개신교가 된 것이다.(기도회와 집회와 행사와 예배가 구분이 잘 안됨)

마치 주일예배와 결혼예배가 큰 차이가 없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와 같이 모든 예배가 이렇게 변질 된 것이다. 철저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의 모습이 개신교의 예배라고 볼 수 있다.

아랍국가나 혹은 다른 종교에서 외적으로 행하는 경건한 모습을 보게 되면 비록 그들은 이방인들로 참 종교는 아니지만 그 모습을 보면 매우경건하며 사람과 신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심지어 땅에 엎드려서 코를 대고 드리는 예배의 모습은 그들의 마음이 높이 계시는 신께 대한 경외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보인다. 개신교에서 예배를 변질시킨 중요한 원인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예배가 인간과 신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면 지금과 같은 개신교의 예배는 매우 변형된 모습일 것이다. 개신교는 찬송도 찬송의 모습이 아니며 기도도 기도의 모습이 아닌 변형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찬송의 가사도 위로 올리는 내용들보다 대부분이 복음가라는 사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찬송을 하면서 편히 앉아서 드리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심지어는 다리를 꼬아서 앉는 모습도 종종 있다) 왜냐하면 복음송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 계시는 분께 찬송으로 드려진다면 지극히 높으신 분께 합당한 자세가 갖추어질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편히 앉아서 찬송을 한다고 하는지 납득이 안 간다. 지금의 찬송의 내용은 인간과 신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모습과 내용의 가사도 아니다. 철저히 인간들 안에서 부르는 형식이라는 것이다.(대중 유행문화)

오늘날 예배의 형식을 잃어버린 것 같이 찬송의 형식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누가 이런 주장을 쓸모없는 주장이라고 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묻고 싶다. 예배는 우리들의 행사가 결코 아니다. 하나님만이 받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모습보다도 경건하고 엄숙해야 하며 위엄 있는 것이 예배의 자세라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야한다는 것이다.(한분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가 예배의 모습)

기도도 마치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개신교의 기도는 철저히 사람 중심으로 나타난다.
하늘에 계시는 분께 직접 올리는 기도는 오늘날의 기도와는 좀 다른 형식일 것이 분명하다.
그 기도는 대화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공적으로는 화답이 있는 것 등이 포함될 것이다.
혹은 성도와 성가대의 화답도 자연스럽게 기도 중에 있을 것이다.

수직적이며 대화식 기도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오는 기도와는 전혀 다르다. 하늘에 있는 분께 땅에 있는 자가 직접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기도를 적어서 사람들에게 낭독하는 것들도 종종 있다. 기도는 예배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요소일 것이다. 하늘에 계신 분과의 대화적인 소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내용에서 이런 내용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받으시옵소서~],[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여!][그렇습니다. 아멘!] 등등 이렇게 부르는 기도의 요청이 수직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공동체의 감사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거룩한 아버지여~ 영광을 세세토록 받으시옵소서~아멘] 등과 같이 하늘을 향해서 땅에 있는 성도가 부르거나 혹은 감사로 부르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수직적인 대화식 기도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개신교에서는 실제적으로 찾기가 힘들게 된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이방인의 종교에서 그러한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방인의 종교에서는 이런 식으로 기도한다는 것이다. 하늘에 계시는 분을 찾는 실제적인 모습을 개신교는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기도문을 따로 만들어야할 처지이다. 물론 찬송가도 그렇다. 지금의 기도는 교인들에게 마치 들려주는 기도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으려는 예배의 기도는 과거 초대교회에서 그리고 그 모습을 카톨릭에서 조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정형화된 기도문대로 해야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기도는 개인의 신앙에 의해서 하나님께 누구나 간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문을 절대시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개신교의 기도는 철저히 수평적인 모습으로 변질되었다.
하늘과 땅의 관계에서 성도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의 실제적인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다.
수직적인 이러한 모습으로 하늘에 올라가는 것과 신과의 관계 속에서 실제 간구하는 성도의 모습이 참 기도의 모습이며 자세일 것이다.

우선 외적인 것부터 바꿔야한다.
예배당의 의자를 없애는 것도 현실적인 방안이다.(환자용이나 기타 특별한 것은 제외)

예배를 드릴 때에 때로는 무릎을 꿇는 것도 매우 당연한 것이며 때로는 위로 향한 경건의 모습으로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도 마땅한 것이다. 때로는 엎드리는 자세도 정당하다. 이렇게 예배는 낮은 자가 지극히 높이 계시는 분께 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참 예배의 모습이 실종된 모습은 청소년들이 드린다는 세속화된 예배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진정한 예배의 모습을 교육받지 못한 젊은이들은 힙합 댄스를 통해서 예배드린다고 한다. 그들만의 문화라고 주장하고 하나님은 이런 것을 통해서 선교가 되길 원한다고 둘러댄다. 그러나 예배는 예배이지 젊은이들의 감정을 만족하게 하는 공연파티나 문화행사가 아니다.(물론 춤도 하나님의 경건한 몸짓이다. 또한 악기도 그렇게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경건의 모습과 내용이 일치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감정에 의해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 앞에 서서 계신다면 그렇게 감히 방자하게 행할 수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예배라고 생각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오늘날 벌어지고 있다.

이제 예배의 회복은 땅과 하늘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모습일 것이다.(계시록의 천사들과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이 경배하는 모습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배는 이렇게 외적으로 내적으로 경건하게 드려지는 것이 옳은 것이다.

설교를 예배에 항상 넣었는데 이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예배는 수직적이라면 말씀은 강론과 같은 수평적으로 전달되는 성경교육과 같은 것이다.
이런 강론과 같은(연설) 것을 가지고 예배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매우 이상한 일이다. 예배가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배는 성도의 의식이 따르며 그 의식에 합당해야 한다.

설교는 수시로 항상 할 수 있다. 앉아서도 할 수 있고 심지어는 누워서도 할 수 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도 할 수 있고 아무나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설교를 할 수 있다.
그러한 내용을 마치 예배의 중심이며 전부와 같이 여기게 만든 것이 오늘날의 교회이다.

설교가 예배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설교는 예배가 아닌 말씀전파나 말씀을 강론하는 교육적인 것이다. 예배의 요소에서 빠져야 될 것이 목사의 설교이다. 또한 강제성을 띄고 있는 헌금일 것이다.(목사들과 교회가 가장 반대할 부분임)

이렇게 예배를 수직적인 것이 아닌 수평적으로 만들자 집회와 예배가 구분이 안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예배는 집회와 그 성격이 다르다. 집회는 목사가 사람들에게 은혜를 받게 하려는 목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집회의 본래 참 의도라는 것이다.

말씀의 교훈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수평적인 관계에 해당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들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신앙의 행위이다. 그러나 예배는 그 자체가 처음부터 수직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끝까지 이어진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것들은 예배에서 제외시켜도 무방한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시간이지 말씀을 듣는 수업시간이 아니다. 그리고 예배의 목적은 은혜를 받는 집회의 목적과도 다르다. 예배는 구원을 받은 자들이 참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적인 나아감이다.(마음을 드리고 바치는 것)

오히려 예배보다 성찬이 차라리 예배의 요소가 될 수는 있다.(때때로)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를 갖추거나 기도하거나 혹은 위로 찬송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찬송은 위로 영광을 돌려드린다는 의미가 나타난다.

구원에 대한 어떤 일이 우리에게 큰 감사가 되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며 그것이 찬송과 기도로 표현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땅에 있는 성도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행위가 예배의 참 모습일 것이다. 이렇게 예배는 우리의 목적이 아닌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신앙행위이다. 그것이 예배의 참 목적과 모습일 것이다.

예배의 외적인 모습이 상실된 중요한 원인은 종교개혁 이후에 말씀을 중시하게 됨으로 외적인 것들은 거의 상실시키고 만 것이다. 그러한 배경에는 종교개혁의 정신과 깊은 연관이 있다. 카톨릭의 수직적인 성직을 거부하고 개신교는 수평적 의회의 모습을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결과 오늘날의 교회정치는 세속화된 민주주의 정치로 나타나고 있다.

카톨릭의 성직의 수직적인 것을 무너뜨린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본래 교회의 수직적인 성직에 대한 이해도 거의 상실된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개인적이 다스림을 잘 용납하지 않게 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적 모습이 카톨릭의 보수적인 교회를 공격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종교개혁은 그러한 시대적인 반영을 통해서 세상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결국 개신교는 수직적인 성직을 원하지 않게 된 것이다.(초대교회 1,2,3 세기의 수직적인 감독정치) 이렇게 사회의 요구와 교회의 개혁이 서로 필요했던 시대가 종교개혁의 시대였던 것이다. 종교개혁에 의해서 초대교회의 감독과 장로와 집사로 다스려지는 수직적인 정치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늘날의 수평적인 의회를 교회에 도입하게 된 역사적 출발이 된 것이다.

사람 중심의 수평적인 교회의 정치에 의해서 이제는 교회의 주권이 교인에게 넘어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교인의 주권은 청소년들의 독자적인 신앙문화를 교회의 한 축으로 끌어들였다. 나아가 공동체를 세대적인 다양한 문화로 만들고 나누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하나의 의식과 예배와 모임을 중요시하였다. 그 이유는 교회가 영적 가족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는 일치성 대신 다양성을 따라가고 있다. 교회정치도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교리신학도 다양하게 나타난 것이다. 모든 면에서 나누어져서 다양한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모습이 수평적인 개신교의 모습니다.

교회의 수직적인 관계의 모습은 다양성보다 일치성으로 나타나야한다. 이단인 카톨릭의 수직적인 교회의 정치는 오늘날까지도 나름대로 하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수평적인 교회를 수직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과감히 바꾸어야 할 것이다.

개신교는 예배의 수직적인 카톨릭의 모습을 개혁하면서 예배를 수평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말씀을 중요시한 결과 보이는 수직적인 예배는 대부분 약화되면서 성도들은 외적인 모습을 대부분 무시하게 된 것이다.(성찬의 약화)

이렇게 오늘날 개신교의 예배는 철저히 수평적인 모습으로 전환된 것이다.
개신교는 신학도 수평적인 인간의 철학적 도움을 받았고 그것은 조직신학이라는 인간사고 중심의 신학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결과 신학도 상호 관계적인 부분은 실패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관계적인 신학은 수평적인 신학과 달리 수직적인 관계에서 설명되어지는 특징이 있다.(동등과 일체적 신학이 아닌 수직과 관계적 신학)

이러한 수직적인 신학까지도 수평적인 조직신학이 점령했던 것이다. 결국 교회의 신학, 예배, 성직 등등 개신교의 모든 곳에서 수직적인 사상이 철저히 배제되었고 수평적인 사상이 그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수평적인 사상은 철저히 사람중심이며 사람에 의한 신학, 예배, 성직 등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제 2 의 종교개혁은 수평적인 것을 벗어나는 수직적인 운동이며 관계적인 운동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예배의 요소를 대충 나름대로 순서 있게 나열하였다.(개인적인 소견에 불과합니다)
1부 예배는 예배가 되어야 하면 2부는 집회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좋을 것으로 봅니다.

*[1부예배]
대부분 일어서서 하거나 혹은 매우 경건한 자세가 요구된다.(30분 정도)

1)예배준비를 위한 묵상(조용히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게 한다)
2)예배로 나아가는 성도의 공동선언(하나님 우리가 이 시간에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3)예배로 나아가면서 찬송한다.(영광송 혹은 화답송)
4)성도들의 신앙고백이 시작된다.(한 소절 한 소절 천천히 낭독한다. 마지막에 전체 화답)
5)성도들의 마음을 모아서 주님께 영광의 찬송을 드린다.(그리고 성가대의 화답)
6)성도들의 공동기도의 시간을 갖는다.(무릎 꿇고, 각자 감사기도, 마지막에 전체 찬송)
7)성도들의 파송과 축도로 예배를 마친다.

*[2부집회]
*2부 순서는 말씀과 교제의 시간(40분 정도)

1)복음가와 찬미 송으로 은혜 있는 시간을 갖는다.
2)말씀을 듣는 강론으로 이어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3)다음에는 성도들끼리 서로 교제하는 시간을 갖는다.(교회소식)

*평일 날에는 말씀을 주로 가르치는 것이 매우 좋을 것 같다.
*주일에는 성찬을 행함으로 공동체가 하나 됨을 확인하고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해야한다.

끝으로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사람의 명령이 아닌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이다....계속

cafe.daum.net/hosannakim

(2007년 4월 4일 김인찬 목사)

글쓴이

김인찬

날짜

2007-04-20 04:28:10


답장 수정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