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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찬 신학 요약자료입니다]**수정



[최초로 공개된 내용들도 포함됨]*(총 66개 글)

김인찬 목사 동영상 사이트입니다.(  http://kiminchan.onmam.com/  )

본인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김인찬 목사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성경연구 자료를 공개하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기도와 성원 그리고 조언을 부탁합니다.

1) 안식일은 문자적으로 안식일 날 성취되었다.(수정)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 날 안식하셨다. 이스라엘이 지킨 안식일 성취는 예수가 죽고 안식 후 첫날 부활함으로 구약의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성취한 것이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지켰던 7일째 안식일 날 무덤으로 들어가 문자적으로 하늘에서 안식을 하셨고 8일째 일요일 날에 새벽에 부활한 것이다.(안식 후 첫 날 부활했다는 증거는 사복음전체에 걸쳐서 모두 기록되었다)

2) 십일조 성취

구약의 십일조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이미 성취되었다.
예수의 부활 이전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백성이지만 예수의 부활이후에는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백성으로 새롭게 구별된다. 십일조는 장자와 장자지파가 얻었으며 또한 고아와 객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원리는 신약의 헌금으로 대치된다.

유일한 장자 예수의 부활은 장자지파라는 신약의 성도들을 세상에서 구별시킨 것이며 그들의 전 재산도 구별된 것이다. 그들의 재산이 바로 구약의 십일조와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헌금으로 드려져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3) 요한 계시록

계시록 5장부터 시작되는 일곱 가지 인봉된 책은 다니엘서에서 인봉된 책과 같은 것이며 계시록 11장까지 열어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계시록 12장부터는 요한에 의해서 인봉된 책이 다시 계시되고 있는 것이다. 12장부터 시작되는 요한에 의해서 다시 계시되는 것은 좀더 자세히 풀어서 계시되는 것으로 구약의 인봉된 책을 다시 예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 의해서 밝히 드러났듯이 구약에서 다니엘에게 주어진 인봉된 책은 요한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번 밝히 예언되게 된 것이다. 그것이 12장부터 끝장까지 이어진다. 이것이 요한 계시록이 주어진 목적이다.(십사만 사천은 이스라엘의 구원받은 총수)

4)구약의 여호와는 성부이며 그 안에 성자가 포함되어있었다.

구약의 여호와는 성부와 성자를 동시에 포함된 이름이다.
말씀(성자)은 성부의 품속에 있었다. 여호와의 품속에 있었다가 신약시대 육체로 입고 오신 여호와의 말씀인 여호와가 예수였던 것이다. 이렇게 여호와는 성부를 가리키는 이름이면서 동시에 성자가 그 안에 포함되어져 함께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먼저 성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아기를 밴 엄마를 부를 때에 그 엄마의 이름을 부르지 뱃속에 있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여호와가 이 땅에 강림한다는 초림의 예언은 성부여호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성부여호와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여호와의 말씀으로써 여호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신약의 표현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이 바로 예수라는 사실이다.

5)성경적인 이원론과 세상에 나타난 세 가지 질서와 신분

성도들의 두 신분 육적인 신분과 영적인 신분 그리고 하늘의 성직과 땅의 직분 또한 육체의 질서와 영적인 질서로 성경적 이원론으로 접근(교회는 육적인 질서가 아닌 영적인 질서 육적인 질서는 세상의 질서로 국가와 사회) 하늘과 땅의 구분은 육체와 영으로 구분된다.

영의 질서는 신과 관계되며 육의 질서는 인간 세상에 적용되는 질서로 원초적인 질서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질서로 구분된다. 원초적인 질서는 가족관계이며 남여 노소의 질서이다. 그 외에 사람들이 만든 질서는 왕정정치 봉건 정치 민주정치 등이다.
교회는 영의 질서에 속하며 성직도 영의 질서에 속한다. 정종분리가 성경적이다.

(세 가지 질서와 세 가지 신분)

a.원초적 질서: 가정의 질서와 육체의 질서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신분인 가정의 질서와 남여노소의 질서

b.국가적 질서: 사회적 질서와 국가적 질서
국가의 시민과 직업 같은 신분인 후천적 질서

c.영적인 질서: 영적인 두 질서와 두 신분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사탄의 종

6)구약시대 죽은 사람들은 모두다 음부에 있었다. 낙원은 예수의 죽음으로 성취되었다.

구약에서 죽은 사람들이 낙원에 있었다는 성경적 근거가 구약성경에 전혀 없다.
성도가 들어갈 낙원은 예수로 처음 준비된 것이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밝히듯이 예수는 낙원이라는 처소를 준비하기 위해서 죽음으로 달려갔으며 그리고 그는 구약의 성도들을 낙원으로 이끌고 하늘에 먼저 올라갔다. 그 후에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 때부터 신약시대 죽은 성도들도 영혼으로 낙원에 직접 오르게 된 것이다.

7)예수는 두 성품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한 신격에 의해서 사람의 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람인 예수는 인성과 신성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한 신격인 말씀이라는 영이 인간과 같은 육신을 입고 참 사람이 된 것으로 이해해야한다. 예수는 두 인격이 아닌 한 신격이라는 영이 있으며 인간의 혼과 육이라는 인성적 요소인 육신을 취하여 참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 사람을 우리는 유일한 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육신이 되실 때에는 마리아의 육신을 취하였고 그가 죽은 다음에는 그의 영혼이 영원한 육체로 부활하여 살아나신 것이다.

8)창세전과 구약성경에서 삼위는 모두 영적인 존재로 존재했었다.

성부도 영적인 존재이며 그 성부의 말씀도 영적인 존재였으며 성령도 성부의 영으로 영적인 존재이다. 성자는 성부의 말씀으로 영으로 존재했으며 성부의 영 안에 있었다. 말씀은 성부의 품속에 있었던 본질적 본체였다. 성부만이 모든 영광을 항상 홀로 받는다. 성자는 홀로 받는 자가 아니며 성부와 함께 영광을 얻는다. 성령은 성부의 영으로 영광을 받는 주체가 아니다.

9)교회 정치는 교황정치도 개신교의 의회정치도 아닌 초대교회 감독정치가 성경적이다.

초대교회의 감독은 지역의 감독이었고 역사적으로 근거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작은 범위는 장로들로 다스려졌고 집사도 있었다. 지역 혹은 도시지역을 담당한 감독의 특징이 있었다. 그러므로 안수의 원리로 한 사람이 한 지역을 감당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10)기도를 세 가지로 이해하였다. 영과 영혼과 영혼육의 기도로 구분된다.

1)영혼과 육체를 가진 사람이 영을 중심으로 하는 영의기도(방언기도)가 있다.
2)영혼과 육체를 가진 사람이 영혼을 중심으로 하는 영혼의 기도가 있다.(묵상기도)
3)영혼과 육체를 가진 사람이 영혼과 육체를 모두 동원해서 하는 기도가 있다.(통성기도)

(영혼육의 처소의 개념)

영은 가장 깊은 곳의 마음의 처소를 의미한다.
혼은 영을 거하게 하는 다음의 처소를 의미한다.
육은 영혼을 거하게 하는 그 다음 처소를 의미한다.

11)하나님의 나라의 실존은 성령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로 왔으며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일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가 성령의 세례를 받음으로 이스라엘 안에 먼저 왔고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신약교회시대에 두 번째 임한 것이 오순절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실존은 성령이다.

12)장자의 전가 이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역할 이삭이 예수의 역할 엘리에셀이 성령의 역할로 나타난다.
이삭이 하나님의 역할 야곱은 예수의 역할과 모든 성도들을 의미하는 12지파의 역할이다.
야곱이 하나님의 역할 요셉은 예수의 역할과 모든 이방과 유대인을 구원하는 역할이다.
모세는 예수의 역할 다음에 여호수아가 예수의 역할 다음은 다윗이 예수의 역할로 나온다

13)세례의 이중성(홍해의 세례와 광야의 세례)

홍해는 중생의 세례로 그리스도와 죽고 살아난 것을 의미한다.(영적으로 원죄에서 해방)
이렇게 홍해에서 중생된 자가 광야에서 죄를 사함 받는 일이 계속된다.(자범죄의 해결)
중생의 세례와 홍해의 세례이다. 단일한 세례에서 두 세례 이론으로 접근한 방법이다.

14)예수의 메시야로써의 양면성(그의 사역에는 유대인과 사탄과 관계된 두 신분이 있다)

*예수는 유대인의 메시야로 출발해서 모든 자들의 메시야로 새롭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예수가 죽기 전에는 적어도 인자의 신분인 유대인만의 메시야로써 활동이었으며 신자의 신분인 하나님 나라의 대표로써 사탄과의 대결이 있었다. 예수는 처음 유대인으로써 메시야로 활동하였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써 영적으로는 사탄과 싸우면서 일한 것이다. 처음 도래한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출발은 요단강에서 처음 임한 성령의 임재로 출발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나라에 철저히 국한 된 나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즉 이방인들까지 모두 구원하는 나라는 적어도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는 유대인의 메시야로써 처음 활동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아들로써 일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그가 유대인을 넘어서는 이방인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다.

예수가 유대인의 신분으로써 활동했던 시기는 하나님의 나라도 유대나라에 국한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부활하여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였을 때에는 그는 유대인의 왕이 아닌 만왕의 왕이 된 것이다. 예수가 부활한 이후 그는 유대인의 메시야가 아닌 만왕의 메시야로 새롭게 출발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도 모든 세상을 향해서 나타난 것이다.

부활이전 그의 신분은 유대인의 왕이며 하늘의 대제사장이며 유대나라에서 활동한 대선지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부활 이후 그의 신분은 새롭게 나타난다. 그 신분은 만왕의 왕이며 영원한 대제사장이며 구원을 얻는 모든 자들에게 대선지가가 되시는 승리의 메시야가 되었다.

15)구약시대 여호와라는 성호는 신약시대에 와서 완전히 사라졌다.

구약시대 유일신의 이름인 여호와 대신 신약시대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로 새롭게 나타난다. 구약에서는 삼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신약시대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분명하게 구분된다. 구약의 여호와가 사용될 수 없게 된 것이다.

16)원죄의 좌소는 육체 안에 해당된다.(원죄) 즉 영혼 안에 원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원죄는 물질도 영적인 존재도 아니다. 원죄는 하나님을 거역하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육체 안에 죄가 있다고 증거 한다. 육체는 유전적으로 죄를 지으려는 육체의 구조로 바뀌어버렸다. 그 아담의 씨를 가지고 온 모든 사람들은 육체가 그렇게 죄를 지으려는 육체를 가지고 오기에 태어나면서 죄를 지으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부모 안에서 죄악 중에 잉태되며 죄인의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며 그리고 살면서 그 원죄로 말미암아 자범죄를 짓는다.

17)아담은 처음부터 완전한 육체가 아닌 죽을 수 있는 육체였다.(부활의 육체가 아님)

죄가 들어오면 죽을 수 있는 육체로 왔다. 그리고 죄를 짓자 그는 죽음으로 달려간 것이다.
아담은 처음부터 죽는 육체로 창조 된 것보다 죽을 수 있는 육체로 창조되었다. 물론 두 가지 논리인 죽는 육체와 죽을 수 있는 육체 모두 학설과 같이 인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은 죽을 수 있는 육체를 채택하였다.

(아담은 처음부터 땅에 속한 자였다)

*사탄 : 인간의 대결을 위한 창조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했어도 아담은 하늘에 속한 자가 처음부터 아니었다.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창조된 땅에 속한 자였다.(예수만이 처음부터 하늘에 속한 자)

아담은 땅에 속하면서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길을 놓고 선택을 해야 되는 존재였다.
이 세상은 사탄이 있었기에 그 안에서 창조 된 사람은 사탄과 대결해야 하는 위치였다.

18)홍해는 중생으로 신앙의 출발이며 요단강은 장성된 자가 가나안에 침노하는 자이다.

신앙의 출발로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새사람을 입는 광야의 과정이 있어야만 그가 천국(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고 성령의 열매(가나안 땅)를 맺는다. 이렇게 구원의 이중성이 있다.
먼저는 무조건 부름이라면 다음은 개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며 지켜야 되는 것이다. 성경은 명백하게 성도가 되었으나 거룩하게 되지 않으면 즉 새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증거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얻는 신분인 성도,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창조물 등은 중생으로 모두 다 경험할 수 있지만 새사람으로 입는 것 거룩함으로 장성한 자가 되는 것은 본인의 책임이다. 믿음으로 열매를 맺는 것은 개인의 소관이다.

성령은 도우신다. 그러나 성령을 쫓는 것은 개인의 것이며 성령은 역사하지만 성령의 열매는 개인이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참으로 개인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다.

19)주기도문은 성취되었다.

신약시대의 기도문이 아니다. 주기도문의 성취는 “나라가 임하옵시며~” 라는 그 나라가 오순절 날 성령의 임함으로 비로써 성취되었다. 그 다음구절은 성취된 것을 성도들이 화답하는 형식으로 보아야 한다. 즉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오심을 의미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신약시대 우리는 마태의 주기도문을 기도문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이미 오순절로 성취된 이후에 대한 공동고백의 성격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수가 죽기 전에는 성취되지 않았던 주기도문의 내용이 부활 후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대로 성취된 것이다. 또 진행 중이다.

20)유대절기 중에서 무교절의 이중성(무교병을 먹는 날이 8일이라는 것)

그러므로 유월절에 무교병을 먹는 것과 다음에 무교병을 7일간 먹는 안식일부터 안식일까지 먹는 7일 무교절이 있다. 사실상 두 무교절로 구분된다. 유월절 무교절과 7일무교절로 구분된다. 니산월 14일(유월절=1일 무교절)과 다음날 니산월 15일부터 21일(7일 무교절)

21)예정론의 오류

칼빈은 예정을 예정으로 이해한 것이 아닌 사실상 창조 안에 있는 계획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신약시대 사람의 구원은 그 계획이라는 예정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이 찾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관계와 시간의 파괴)

그러므로 예정은 창세전 예정이며 현재적 선택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면 예정은 예정대로 남게 되고 선택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선택이 모두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그리고 사람의 선택이 따라오게 된다.(예정대로)

22)불신자들은 현재 지옥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영혼으로 지옥에 들어갈 수 없다)

지옥은 죽은 자들이 영혼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육체와 영혼으로 들어간다.
불신자들은 현재 지옥에 있는 것이 아닌 음부에 있다.(성도는 낙원에)
불신자들은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음부에 있었다. 지옥은 육체로 고통당하는 장소이다.
성경은 명백하게 육체와 영혼으로 던져지는 곳으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불못이 지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미 지옥은 준비되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도 준비되고 있다.

23)세례요한 예수보다 왜 일찍 죽었어야 했는가?

세례요한은 예수를 위해서 철저히 희생한 것이다. 예비자의 삶을 살았다.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정치적으로 대항함으로 헤롯은 예수를 강하게 경계하지 않았다.
초기에 세례요한은 정치적으로 헤롯과 직접 대항했다면 예수는 종교적으로만 활동하였다.

24)성경적 교회정치인 유일한 안수의 원리

초대교회는 성직을 세울 때에 하늘에서 세운다는 의미로 안수해서 성직을 세웠다.
안수의 의미는 하늘에서 땅에 있는 교회 안에 성직을 개인적으로 세운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인적인 성직이 교회정치의 출발이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교회 안에 여러 교사들을 두거나 혹은 각종 필요에 따라서 임시직들을 세우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다스림이 바로 성경적인 정치의 원리이다. 사도들은 조직을 만든 것이 아닌 개인적으로 안수해서 세우는 성직을 교회에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조직은 안수해서 세울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는 오늘날과 같은 의회정치와는 다른 것이다.

25)원죄는 육체에 영향을 주고 있다. 원죄로 육체는 죄를 지으려는 육체로 나타난 것이다.

원죄의 출발은 아담으로 출발한다.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적인 곳에 영향을 주었다. 파괴의 모습이나 약육강식의 모습 등이 모두 원죄에 의해서 변형된 모습일 것이다.

처음 창조 된 곳은 그러한 모습이 아니었다. 원죄가 들어온 이후로 원죄의 영향을 하나님은 허락하셨다. 죄의 모습이 보이는 물질적 세계에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사람의 육체도 영향을 받는다.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아담으로 오는 생육의 법칙에 의해서 죄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죄의 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죄의 종이 된 육체와 같다는 의미이다.

원죄가 있는 육체는 자범죄를 지으려는 성향이 있다. 그리고 모든 인류가 자범죄를 지음으로 타락하게 된다. 이와 같이 창조 된 세상은 원죄가 있는 곳이며 그 원죄는 우리의 육체 안에도 있다는 것이다.

26)창조세계는 내세의 하늘나라와 현세라는 지상세계의 축소판이다.

지구의 하늘은 하늘나라의 모형이며 지구의 땅은 지상세계의 모형과 같다.
구름위의 세계는 지상세계를 넘어선 하늘 위의 내세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구름 아래는 지상세계의 공중이며 이 땅은 우리가 있는 땅과 같다. 이렇게 땅과 공중과 하늘의 세계라는 모습이 창조의 모습에서 축소판과 같이 나타난다.

태양은 마치 하늘과 땅에 비추이는 하나님의 빛과 같다. 그 빛이 비추면 어둠이 물러간다.
태양자체는 빛이다. 그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어둠이 없다. 이것도 영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태양과 같은 하늘 위에서 빛이 세상에 비추이고 있다. 죄가 있는 이 세상에 빛이 비추고 있는 것과 같다. 본래 지구는 하나의 땅이었다. 그런데 범죄로 말미암아 갈라져서 오늘날과 같은 오대양 육대주가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갈라진 세상을 의미한다.

27)중력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이 변형되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 변형이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에 의해서 시간가 공간이 변형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은 무형이며 공간은 물질과 물질이 있는 사이를 말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이 변형되는 것이 아니다. 물질의 변형에 의해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은 변형되지 않는다.

물질적인 시계를 두고서 속도를 측정하면 시간이 빨라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중력의 영향으로 시계라는 기계자체가 영향을 받기 때문이지 시간이라는 무형적인 것이 변형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물질이 아니다.

28)구약과 신약의 명칭 사용으로 오해를 일으켰다.

구약은 이미 지나간 옛 언약으로 생각하였기에 도올은 구약성경이 이미 성취된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옛 언약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에는 재림의 약속까지 포함되어있다. 또한 예언적이 의미로 약속되고 현재 성취되는 중이다. 특히 새 언약까지도 약속한 책이며 새 언약으로 이루어지는 지금의 모습도 약속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보다는 예수 오시기 전의 책과 예수 오신 이후의 책으로 구분하는 것이 옳다. 혹은 옛 언약 안에서 기록된 책과 새 언약 안에서 기록된 책으로 말할 수 있다.

29)예수의 죽음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최초공개)

그리스도의 죽음은 신자들에게 유익하며 불신자들에는 심판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두에게 해당된다. 불신자이든 신자이든 부활한다.
그러나 신자들은 영생의 부활이며 불신자들에게는 영벌의 부활이 될 것이다.

약 2000년 전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이 세상에서 죽은 자들이 그 때부터 나누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나누어지는 시작이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음부와 낙원)
죽은 자들에 대해서 설명하면 신자는 현재 낙원에 불신자는 현재 음부에 있다.

30)[하나님] 대신 [신]이라는 호칭으로 바꿔야 한다.

하나님이라는 호칭에서 [-님]이라는 존칭의 사용은 한국 기독교가 임으로 만들었다.
본래 하나님은 헬라어로 데오스이다. 이는 [신]이라는 용어로 이해해야 한다.

마치 신님이라고 부르는 한국의 용어사용은 헬라어 데오스와 전혀 다른 사용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신]이라고 바꿔야 된다고 본다.

삼위일체 사상에 의해서 신을 하나님으로 바꾸고 거기에다 -님이라는 일인칭 존칭까지 항상 포함시켰다는 것은 성경을 왜곡한 첫 번째 사례이다.

이러한 사상의 근본은 한국의 문화에 맞추려는 의도에서 나타난 것이다.
선생을 선생님으로 부르거나 혹은 아버지를 아버님으로 부르는 존칭을 그대로 도용한 것으로 본다. 그 결과 성경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이해도 우리이 용법으로 상요하였다.

31)아브라함의 언약에는 두 언약이 있다.

이스라엘에 해당되는 옛 언약과 영적 이스라엘에 해당되는 새 언약이 포함된 언약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독자적인 언약이다.
그 언약에 의해서 두 언약이 나타난다.
첫 언약의 출발은 이삭으로 그리고 두 번째 언약의 출발은 예수로 출발한다.

지금은 새 언약의 시대이며 이는 아브라함의 언약(약속)이 성취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언약이 모두 지나간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언약만 지나갔다.

32)감독은 성도이면서 감독직 소유(이원론적 직분이해)

감독은 성도로써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며 직분으로써는 성도를 다스리는 것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감독은 감독으로써 성도를 다스린다. 동시에 감독도 교회의 성도임으로 성도를 섬기는 것이다. 어떻게 섬기는가? 그것은 성도를 다스림으로 성도를 섬기는 것이다.

성도를 섬긴다는 것은 감독의 직분자체가 성도들의 종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직분을 가진 성도가 그 직분의 권한으로 성도들을 잘 다스리는 것이 곧 성도를 섬기는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감독에게 성도를 다스리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을 잘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성도를 섬기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감독이 같은 성도로써 성도를 섬기는 것은 종의 역할과 같다. 그러나 감독직이라는 하나님의 직분이 교인의 직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1)감독자는 직분으로써 다스림이 강조된다.(하나님의 종)
2)감독자는 모든 성도와 같은 성도이기에 성도들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성도의 종)
3)그 섬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직분을 잘 감당하므로 같은 성도로써 성도들을 섬긴다.

33)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의미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중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물=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지냄을 의미
*성령으로 거듭난다=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다는 것을 의미

이렇게 물은 예수의 죽음을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은 중생으로 세상에서 믿기 시작한 자들에게 일어나는 초기 현상이다.

34)예수는 모든 육체를 대표해서 죽었다.

예수의 육체자체의 죽음은 모든 육체의 죽음을 대표한 육체자체의 죽음이다.
예수의 육체자체의 부활은 모든 육체의 부활을 대표한 육체자체의 부활이다.

예수가 모든 육체의 대표로써 세상에서 죽은 것이다.
모든 죄인 된 사람의 육체를 대표한 것이며 그 안에서 믿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는다.

예수의 육체자체의 부활은 모든 사람의 육체를 대표로해서 살아났다.
예수의 부활로 모든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과 같이 모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심판이다.

예수는 영혼이 죽은 것이 아니다. 육체가 죽은 것이다.
육체로 죽으시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
모든 사람들 대표한 예수의 육체의 죽음은 모든 영혼을 심판하는 첫째부활을 이루게 된다.

그의 죽음으로 낙원과 음부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활은 모든 사람의 육체를 살려서 심판하게 될 것이다.

35)로마서의 원죄에 대한 이해(최초내용)

*먼저 죄를 세 가지로 분류하고 적용시켰다.

1)원죄
2)우발죄
3)자범죄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되는 내용은 육체의 원죄와 혼의 우발죄와 영의 자범죄로 구분한다.
그리고 중생으로 원죄와 분리된 상태가 된다.(의와 죄)

신자가 죽으면 원죄에서 벗어나고 자범죄는 세상에서 용서받았기에 낙원에 오른다.
불신자가 죽으면 원죄에서 벗어나지만 자범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음부에 들어간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자범죄를 사함 받은 자들은 영생을 그렇지 못한 자는 영벌이 된다.

36)예수의 속죄에 대한 이해(최초)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적용되는 속죄

1)십자가 고초: 자범죄를 위한 것
2)육체자체의 죽음: 모든 육체를 심판한 죽음(원죄의 심판)
3)육체자체의 부활: 모든 자들을 심판하기위한 부활(최후심판)

이렇게 3가지로 적용하였다.

37)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아담의 역사도 그렇다.
가인이 먼저 태어났지만 하나님은 아벨을 인정했으며 아벨이 죽자 나중에 태어난 셋을 인정한다. 가인은 사탄과 같은 위치라면 아벨은 예수의 희생을 셋을 예수의 부활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의 역사도 그렇다.
먼저는 이스마엘이 장자로 태어나지만 하나님은 이삭을 선택한다.

*이삭의 역사도 그렇다.
이삭의 아들 장자 애서가 먼저 태어났지만 하나님은 애서대신 야곱을 선택한다.

*야곱도의 역사도 그렇다.
야곱의 아들들 중에서 먼저 형제들이 인정되지만 버림받은 요셉이 후에 총리가 된다.

*모세의 역사도 그렇다.
바로의 아들이 장자이지만(장자 재앙으로 죽음) 하나님은 모세를 선택하여 일한다.

*다윗의 역사도 그렇다.
먼저는 형들이 인정되지만 나중 된 다윗을 하나님은 선택해서 왕으로 등극시킨다.
사울 왕이 먼저 되지만 하나님은 나중 된 다윗을 왕으로 세운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그렇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먼저 선택했지만 하나님은 나중 된 이방인들도 구원한다.

*예수의 역사도 그렇다.
아담이 먼저이고 사탄이 먼저였다.
나중에 온 예수는 아담대신 모든 사람의 대표로 사탄과 싸운 것이다. 사탄을 이기고 왕권을 얻었다.

*예수의 구원이 이스라엘 중동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들이 버림을 받고 동서지역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서방이 다시 하나님을 등지자 구원의 복음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역사도 그렇다. 북한이 먼저 구원의 기지였지만 일제 신사참배를 회개하지 않음으로 구원의 기지가 남한으로 넘어온 것이다. 우리는 이제 복음을 놓치지 말아야한다.

38)관계적이고 수직적인 예배

하늘과 땅으로 구분되는 관계에서 수직적인 예배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
땅에서 성령으로 우리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그 모습은 수직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수평적인 모습이 아닌 수직적인 예배의 모습은 하늘을 향한다.

39)하나님 나라와 성령 그리고 왕과 교회

하나님 나라는 성부의 나라이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나라의 소유주가 되신다.

땅에서는 성령이 임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의해서 백성으로 땅에서 부름을 받았다.

성령은 하나님 나라의 실존적인 통치이다.
그 나라에 의해서 교회가 통치를 받는다.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은 성부이며 그 나라의 실존적 통치는 성령이시다.
그 나라의 왕은 그리스도이며 그 나라의 백성은 성도이다.

하나님과 성령은 분리 되지 않고 연결된다.
성부는 성령으로 땅에 자신의 나라를 세운다.

하나님 나라와 왕과 교회는 분리해서 이해된다.
예수는 나라가 아닌 나라의 왕이며 교회도 나라가 아닌 나라의 백성이다.

하나님 나라의 성령에 의해서 나라가 확장된다.
그 나라(성령)와 그 나라의 왕과 그 나라의 백성은 성부의 소유된 나라와 구성이다.

40)삼위일체와 양성론도 개혁되어야 한다.

일체신학사상에서 관계적인 삼위로 이해해야한다.
성부는 하나님이시며 성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성부는 자기 영을 성자에게 주셨고 성자는 그 아버지의 영을 우리에게도 허락한 것이다.

성부는 죽지 않으시고 변함이 없는 본체자체이시다.
모든 영광을 홀로 받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가 용서와 심판주가 되신다.
육신으로 오기 전 성자는 성부 품안에 성자가 포함되어있었다. 그러다가 성령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렇게 분리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삼위로 나타난 것이다.

창세전에 삼위는 영으로 존재하였다.
물질이 아닌 혼도 아닌 영적인 존재이다.
성부도 영으로 성자도 영으로 성령도 영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성자라는 영은 혼과 육체라는 육신을 입고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다.

예수는 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그 영인 말씀이 육신을 취하여 사람이 되신 것이다.

http://cafe.daum.net/hosannakim  (2007년 6월 24일 김인찬 목사) 

**[두 번째 김인찬신학 자료입니다.]*(최초 자료포함)

*글이 조금 길어서 죄송합니다. 최초로 공개된 내용들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언제든지 수정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조언과 그리고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41) 율법과 은혜의 법

율법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법이다.
율법 아래에서는 의를 얻지 못한다. 율법은 죄에 대해서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적 요소 중에서도 십일조나 안식일 등은 이미 이루어진 것들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폐하여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형성된 윤리적인 율법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한 율법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의를 요구하고 있다.

예수는 이러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닌 완전케 하려고 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율법위에 있는 또 다른 은혜의 법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가 율법을 완전케 했다는 것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하게 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과 같다.

율법이 요구했던 의를 모든 사람들은 만족하게 할 수 없었지만 이 요구를 예수 홀로 만족하게 했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자기의 의를 의지하는 자들에게도 율법의 요구인 만족을 얻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즉 은혜 안에서 율법을 만족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에 속한 자가 아닌 은혜 안에 속한 자가 된 것이다.

지금도 율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 율법 안에서는 누구도 의를 얻지 못한다.
우리는 율법 안에 있는 자가 아닌 은혜 안에 있으며 그 안에서 우리는 율법의 의를 만족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율법을 만족하게 하는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의 삶은 율법의 요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람을 은혜 안에서 실천하면서 사는 자들이다.

이렇게 율법이 있고 율법을 만족하게 하는 또 다른 은혜의 법이 있는 것이다.
은혜의 법은 율법 안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만족하게 한다. 율법 안에서 이루지 못하는 것들을 은혜 안에서는 완전히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 안에서 우리는 해방되고 은혜 안에 거하게 된 것이다. 그 안에서는 언제든지 의로 인정 받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율법과 은혜의 법은 수직적이며 은혜가 율법 위에 올라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과 은혜의 법은 서로 혼합된 것이 아닌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다.
은혜 안에서의 삶은 율법 안에서의 정죄되는 삶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42) 천국과 지옥에서 삼차원적 세계관으로 이해해야 한다.

천국과 지옥의 개념은 최후 심판의 성격이 강하다.
성경에서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은 마지막 심판을 말한다.

그러므로 세계관을 이 지상세계와 그리고 하늘나라와 지하세계인 음부로 이해해야한다.
물론 그러한 세계는 차원이 다른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수직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차원이 다른 세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현 세상은 보이는 세계로써 물질적인 세계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육체가 깨어지면 두 장소로 옮겨진다.
그곳은 음부와 낙원이라는 곳이다. 이렇게 음부와 낙원 그리고 이 세상이라는 삼차원적 세계관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43)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는 물질세계에 국한된 창조였다.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천사나 기타 영으로만 있는 존재까지 포함한 창조가 아니었다.
철저히 인간과 인간이 사는 지구를 중심으로 창조된 것이다. 인간이라는 보이는 육체를 가진 자가 존재하도록 물질세계에서 지구를 중심으로 먼저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영혼과 육체를 가진 사람을 창조한 것이다. 이렇게 천지창조는 사람과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에 초점을 맞춘 창조였던 것이다.

흔히 천사나 기타 영적인 내세까지 창세기 1장에서 모두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무리한 주장이다.(물론 천사들도 창조되었지만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창세기의 창조는 철저히 지상세계에 국한 된 것이었으며 그 안에서 인간과 동물과 식물들을 창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들이 거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한 것이 창조이다.

과거 기독교는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마치 보이지 않는 내세까지 포함시켰다. 그러다 보니 천사나 영의 세계까지도 포함된 창조로 단정 짓고 설명했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무리한 주장이다. 우리가 죽으면 내세의 세계로 가는데 그곳이 창조된 곳이라면 창조된 이곳에서 창조된 저곳으로 옮기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죄는 창세기의 창조된 곳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내세가 창조된 곳이라면 죄가 그곳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창조는 철저히 현세의 창조사건이지 내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첫 창조된 세상이 심판된다는 것이 재림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창조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현세에 묶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과거 교회는 창조도 완전한 창조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회복될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재림으로 오는 세계는 더 나은 세계이다. 회복이 아닌 완전한 세계라는 것이다.

44) 예수는 성령을 받았지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는 요단강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 아닌 물세례 이후 성령을 받은 것이다.
먼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례에서 침례로 바꾸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침례의 의미는 죄를 씻는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죽음과 장사지낸다는 의미가 있다.

예수는 위와 같은 죄 씻음과 그리고 중생을 위한 세례가 전혀 필요 없는 것도 사실이다.
예수는 요한에게 침례를 받은 것은 자신이 그렇게 죽을 것을 두고서 침례를 받은 것이며 또한 성령을 받은 것은 자신이 성령으로 부활하여 살리심을 얻을 것을 의미하는 의식도 된다.

사역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을 이루는 메시아로써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 진정한 구원의 사역을 시작한다는 의미도 있다. 특히 그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은 것과 성령을 받은 것은 장차 그가 하나님의 일을 성령으로 감당하는 것도 해당될 것이다.

세례는 이렇게 죽음과 장사지낸다는 의미가 먼저 있다면 그것은 예수 자신에게 먼저 해당되는 것이다. 예수 자신도 세례와 같이 죽고 또한 장사지내게 되었다. 즉 세례를 받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만 성령세례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그가 홀로 죽은 것이지 성령이 도와서 함께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예수 홀로 장사지낸 것이지 성령과 함께 장사지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는 순수 자신의 육체를 버리는 세례와 같은 일을 감당한 것이지 성령의 도움으로 그런 육체적 고통을 감당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가 세례의 의미와 같이 먼저 죽고서 장사지내게 되자 죄가 없는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그의 육체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에게 있어서 세례는 예수자신의 육체적 죽음과 그리고 장사지낸 것에 해당된다면 성령으로 부활하심은 그렇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를 성령이 살린 것으로 이해해야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육체적으로 세례의 의미인 죽음과 장사지냄을 경험하였고 성령은 세례를 받은 그의 육체를 다시 살린 것이다. 결국 예수의 육체적 세례와 성령의 살리심으로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와 성령을 구분한다면 예수는 세례와 같이 먼저 희생하였고 성령은 그를 살리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는 세례를 육체적으로 감당한 것이라면 성령은 그를 살리신 것이다. 성경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림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세례와 성령을 구분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살리신 것을 세례로 보는 것보다 참 세례를 경험한 예수를 성령이 살린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예수에게 있어서 세례(죽음)와 성령(부활)의 사역을 각각 구분한다면 우리는 예수가 성령세례를 받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세례의 죽음과 성령의 살리심으로 각각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분명하게도 예수는 성령과 분리된 적이 있었다. 즉 내주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아버지께로 가실 때에 그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독자적으로 분리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도 육체와 분리됨으로 영혼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낙원에 오른 상태는 성령의 내주가 예수의 영혼 안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성령은 이 땅에서 예수의 영혼을 하늘로 이끌고서 올라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죽자 그 영혼에 성령이 내주한다면 혼합사상이 되며 이것은 지방교회의 영으로 혼합되는 이론과 같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주는 철저히 육체 안에 국한 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하늘에 영혼으로 가셔서 그가 다시 세상에 부활하실 때에 그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성령을 성도에게 부어 주시기 위해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는 영혼과 육체를 가진 부활체로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로 가셨다는 것이다. 그 아버지와 함께 하심으로 자신 안에 있는 성령을 비로써 이 세상에 보내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가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한 것은 성령으로 함께한 것이다.

45)또 다른 글

세례는 죄 씻음만을 의미하는가?
세례는 죄를 씻는 의미도 있지만 육체의 죽음과 장사지냄의 의미가 더 강하다는 것이다.

특히 죽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분명하게도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지냄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세례의 의미는 일단 죽음과 장사지냄으로 먼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세례에서 침례로 바꾸어서 생각하게 되면 그 의미는 부활까지 포함하지 않을 수 있다.
즉 일차적으로 세례는 죽음과 장사지냄까지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리고 부활은 그렇게 죽음과 장사지냄과 같은 침례 가운데 부활한다는 것이며 이는 성령으로 일으킴을 얻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부활 즉 일으킴에 대해서는 세례로 말하지 않는다. 성령으로 일으킨다. 혹은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의 생명과 같이 일어난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세례와 성령을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가 요한에게 성령을 받은 것이 성령세례인가 아니면 성령의 임재인가?
본인은 성령을 받은 것을 세례와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죄를 씻는 의미보다는 그가 장차 죽은 자 가운데서 성령으로 일으킴을 얻기 위해서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에 의해서 그는 물세례를 받았다. 그 세례의 의미를 우리는 예수 자신에게 먼저 적용시켜야 한다.

세례를 죄인들의 죄를 씻는 것으로 적용하는 것보다 예수자신의 죽음과 장사지냄으로 직접 연결한다면 그 이후에 성령이 임하는 것은 죽음과 장사지냄에서 그가 살아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부활의 생명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에게 받은 물세례와 성령의 임재는 그의 죽음과 부활을 두고서 행하는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는 세례와 같이 육체로 죽으시고 성령으로 일으킨다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째든 예수에게 성령세례라는 말이 직접 어울리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예수 자신의 죽음과 장사지냄이 세례와 같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부활한 것은 성령으로 일으킴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그에게 내주하게 된 것이며 그 성령을 하늘로 오르신 이후에 우리들에게도 보내주신 것이다. 부활 후 예수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예수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예수에게는 세례와 성령으로 각각 구분해서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단강에서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 받은 것과 성령이 임한 것을 우리는 혼합해서 성령세례로 단순히 이해하는 것보다 그 순서대로 각각 세례와 성령으로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러면 세례와 성령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단강의 세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지냄을 의미할 수 있다.
그리고 침례 가운데 일으킴을 얻는 것은 성령으로 일으킴을 얻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침례라고 이해하면 육체에 해당되는 죽음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성령으로 그가 살아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다.

사실 예수도 세례와 같이 먼저 십자가로 죽고 장사지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예수도 세례와 같은 죽음을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일으킴을 얻은 것이 부활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 그 자신이 이룰 세례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요단강에서 성령이 임한 것은 성령으로 그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날 것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임한 오순절의 성령은 성령세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순절 날에 임한 성령은 예수 안에 있었던 예수의 영으로 우리들에게 임한 것이다.

그 성령이 성도들의 육체에 부으심은 성도들을 예수와 함께 죽음과 장사지냄으로 적용하고 나아가서 그 육체 안에 성령이 내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성령이 오신 오순절의 사건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다는 중생의 사건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에게는 성령세례라는 말이 모순이 되지만 성도들에게는 성령세례로 중생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성령으로 예수와 함께 죽고 성령으로 예수와 함께 산 생명이 된 영적인 중생자의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한다는 것은 새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며 부활의 생명과 같다는 것이다. 중생은 이렇게 죽고 사는 영적인 성령의 역사이다.

이렇게 오순절 날에 성령이 오셔서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중생의 성령세례와 요단강에서 예수에게 임한 성령은 같은 성령이나 성격은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예수는 중생을 위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닌 성령의 임재였던 것이다.

이렇게 성도들에게 임한 처음 임한 중생의 성령임재는 성령세례와 같은 것이며 그 이후는 성령이 내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얻게 된다. 또한 죄를 사함 받는 일도 일어난다. 성령의 도움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다.

*[예수는 잉태될 때부터 성령이 내주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육신 안에 성령이 처음부터 내주하였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이 되신 예수는 영혼과 육체를 가지신 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 예수는 요단강에서 성령을 하늘로부터 받으셔서 아버지의 영이 내주하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수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이며 특히 그 안에 아버지의 영이 거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독립적으로 말하면 영혼과 육체를 가지신 사람으로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만약에 예수가 이 땅에 오실 때에 성령이 내주한 상태로 잉태되어 오셨다면 예수는 우리와 처음부터 다른 상태가 된다는 이론이다.

물론 예수는 처음부터 죄가 없지만 성령이 예수 안에 처음부터 내주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 이유는 예수의 탄생기사나 그 이전 성령이 예수 안에 내주하였다는 것을 성경에서 그 증거를 분명히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 성령이 내주하지 않았지만 성령이 예수와 함께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옳을 것일까?

성령이 예수 안에 처음부터 내주하였다면 예수의 구원사역은 잉태된 그때부터 해당된다.
그러나 구원사역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듯이 예수가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은 이후에 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사역을 위해서 성령을 받았던 것이 과연 성령의 내주인가? 아니면 단순한 임재였는가? 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수 안에 성령이 처음부터 내주하였다면 헤롯의 압제 속에서 예수는 성령을 동원해서 스스로 피한 것으로 말하거나 혹은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이 예수를 도왔다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다.

또 어린 예수는 성령으로 어렸을 때부터 귀신들을 쫓아내거나 혹은 사탄들과 대적하면서 일했다는 것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이해는 성령은 예수를 철저히 사탄과 그리고 세상의 정치적인 희생을 당하지 않도록 그를 외적인 환경에서 도운 것으로 보아야지 예수 안에 내주하여서 그를 처음부터 도운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영혼과 성령이 예수의 육체 안에 처음부터 함께 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은 예수의 육체 안에 두 인격적인 존재가 모두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예수는 성령을 통해서 처음부터 일했다는 것이고 성령으로 모든 것을 감당했다는 것이 된다. 예수가 성령으로 모든 일을 처음부터 행했다면 어렸을 때부터 성령은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예수가 아기였을 때에는 어린 아기였을 뿐이다. 즉 의식이 아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기 예수가 마치 아기인데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여 계시기 때문에 아기 예수의 의식수준이 하늘의 이치를 모두 알고 있는 상태였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가 아기였을 때에는 아기의 수준으로 그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통 이해한다면 예수의 자의식과 상관없이 성령이 어린 예수 안에 있었다는 것은 납득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왔던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성령으로 잉태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이것은 성령의 내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성령의 내주가 없었다. 그런데 예수는 유일하게 세상에서 성령을 처음으로 받아 소유한 분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차이는 그 자신이 먼저 성령을 받고서 장차 자신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도 같은 성령을 부어주시기 위해서 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부활 이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한 예수는 자신 안에 성령이 내주하여 있다는 것이며 그 성령을 받으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의 의미는 그리스도가 성령을 소유했던 영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소유했던 영을 우리들에게 부어 주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예수 자신이 성령을 소유했던 때는 언제인가?
처음 예수가 잉태된 순간이거나 혹은 의식이 아기였을 때부터 성령을 그가 처음부터 소유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의식적으로 성령을 소유할 수 있음으로 예수가 아기의 의식수준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아기였을 때부터 혹은 잉태될 때부터 예수가 성령을 소유했다고 보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어떤 이는 성령이 예수의 의식과 전혀 상관없이 잉태될 때부터 그 안에 내주한 것으로 이해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라는 의미는 예수가 소유했던 영을 의미한다. 예수의 의식과 상관없이 성령을 아기 예수가 처음부터 소유했다는 것은 납득이 안 되는 문제이다.

오히려 예수의 영이라는 의미는 예수가 세상에서 소유한 하나님의 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럼 그 때가 언제인가? 자연스럽게 세례요한을 떠올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그가 일한 것이다. 물론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서는 기적과 이적을 결코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도 성령을 받고서 성령을 통해서 일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세례요한의 세례이후 성령이 예수에게 임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으로 동일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나라의 실존이기 때문이다. 예수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무리 중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 세례요한의 설교는 이미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들에게 가까이 왔다고 전한 것이다. 즉 이미 도착하였다는 의미이다. 그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사역 중에서 능력으로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성령의 활동)의 시작은 예수가 잉태되는 그 때가 아님은 분명하다. 만약에 예수가 잉태될 때부터 성령이 예수 안에 내주하였다고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그 때부터 임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러한 증거를 주지 않고 있다. 성경은 단순히 아기 예수로 태어난 것을 증거하고 있지 태어날 때부터 성령이 임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성경은 잉태될 때부터 하나님의 나라(성령)가 임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무리 중에 있다는 예수의 확실한 증거대로 이미 예수의 사역과 함께 예수 안에 하나님의 성령도 함께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사역 가운데 이미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도 사역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를 두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 예수 자신이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 안에 성령이 내주하고 있는 것을 염두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 임했던 시기는 매우 자연스럽게 요단강에서 임한 성령으로 이해할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그가 일한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가 유대 땅에서 나타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말한 그 때는 그가 세상에 태어날 때가 아님은 분명한 것이다. 오히려 그 임했던 시기는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는 요단강에서 임한 성령을 연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 때가 아니면 임했던 그 시기는 찾기가 힘들 것이다.

예수가 요단강에서 성령을 처음 받았다는 증거는 그가 요단강 세례 이전에는 어떠한 기적과 이적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요단강 세례 이전에는 성령을 동원해서 구원의 사역을 감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안에 성령의 내주가 아닌 것을 입증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요단강 세례 이후에 비로써 기적과 이적 그리고 성령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등 구원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감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요단강에서 처음 성령을 받은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것은 메시야로써 공식적인 사역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출발을 의미한다. 이러한 메시야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영원한 메시야로 나타났으며 성취된 하나님 나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요단강에서의 성령임재는 성취된 하나님 나라가 아닌 성취될 나라를 위한 출발로써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47) 역사적 성령의 임재 그리고 개인의 단회적 성령의 임재와 반복적인 성령충만의 역사

a. 역사적 성령의 임재(단회적)
오순절 날 이 땅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죄인들에게 임한 역사적인 사실이며 단회적인 사건이다.
또한 이러한 성령이 교회를 통해서 역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성도 안에서 역사하신다.

b. 개인적 성령의 내적인 임재(단회적)
개인이 예수를 믿고 회개함으로 과거 세상에 임한 성령이 그에게도 단회적으로 임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개인 안에 내주하게 되는 시작이다. 그리고 그 안에 머물게 된 것이다.
성령이 개인적으로 개인 안에 처음 오는 것은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c. 개인적 성령의 내적인 충만한 역사(반복적)
개인에게 단회적으로 임한 성령은 그 안에 계신다. 그 성령은 그 안에서 일하신다.
그의 믿음에 따라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혹은 성령의 도움으로 그가 일하게 된다.
서로 사귐이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어서 서로 사귐이 있는 역사이다. 성령으로 우리는 날마다 충만한 역사를 위해서 믿음으로 의지해야 한다. 의지하는 자에게 성령의 역사는 나타난다. 성령의 충만은 그 정도가 각각 다르다. 믿음에 따라서 다르다.

죄를 따라가는 자에게는 성령의 역사는 없다. 그러나 성령을 의지하면서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에게는 성령의 내적인 충만한 역사가 따라오게 된다. 그것은 내적인 열매로도 나타난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이다. 외적으로도 나타난다. 간혹 기적이 있을 수 있으며 혹은 방언이나 기타 성령으로 나타나는 것 등이다.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충만히 얻게 되는 경우도 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 그리고 성령충만으로 각각 구분하자]**

앞서 요단강에서 물세례와 예수에게 임한 성령을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는 성도들이 받는 물세례와 영적으로 보이지 않는 성령세례를 구분해야 됨을 주장하려고 한다. 성도들이 받는 세례는 이렇게 보이는 물세례와 보이지 않는 참 세례가 있다.

보이는 할례가 있었듯이 진정으로 마음의 할례가 있다는 것이다.
보이는 세례가 있듯이 진정으로 마음으로 얻는 중생의 성령세례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구원의 표징으로 물세례가 주어진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 진정으로 믿음과 회개가 없이 물세례를 받는 다면 참 세례인 성령세례라는 중생의 세례는 없는 것이다. 진정한 세례는 바로 물세례가 아닌 이면적 세례라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물세례가 있다면 또한 불세례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a) 물세례는 물로 세례를 주는 것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냄을 의미하는 표식이며(그리스도와 함께)또한 새 생명으로 일으킴을 얻는 중생을 의미하는 표식이다.
b) 성령세례는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얻은 영적인 새로운 생명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중생된 자이며 이 때부터 성령이 내주하게 되는 것이다.
c) 성령충만는 성령세례로 중생을 얻은 자들이 자신 안에 내주하고 있는 성령을 통해서 충만함을 얻게 되는 삶이다. 믿음과 순종함으로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48) 성령의 좌소는 어디인가?

성령은 우리의 영 안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만약에 성령이 우리의 영 안에 있다면 혼합사상으로 나아간다.(지방교회)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몸 안에 있다. 성경은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증거 한다.

우리의 몸은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있다. 물론 영은 혼과 함께 몸 안에 거한다.
성령은 우리의 몸 안에 내주하신다. 그래서 성령의 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몸 안에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몸 안에 성령이 계시고 내 영과 함께 교통하는 것이다.
물론 성령으로 우리는 몸의 사욕을 쫓지 말고 성령을 쫓아서 몸을 의의 병기로 사용하는 영이 되어야 한다. 즉 내 영혼이 성령을 따라간다면 몸을 죄에게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몸은 그 안에 성령이 계시고 그 성령으로 영혼이 순종하는 자들이다.

49) 삼위와 사람의 구성요소와의 비교

A. 사람의 혼과 성령과의 비교

1)우리의 혼
우리의 혼이 영의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서 육체를 사용하면 육체는 순종한다.
우리의 혼은 이렇게 영의 뜻을 위해서 일하는 혼으로 영에게 순종하면서 육체를 움직인다.
우리의 혼은 영과 육을 연결하는 기능을 감당한다. 중간에서 수행하는 영의 혼이다.
우리의 혼은 육체로 얻은 모든 기쁨을 느끼고 영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2)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성령은 성부의 뜻을 위해서 일하는 영으로 그리스도가 세운 구원을 적용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본체의 유일한 영으로 성부가 소유하며 성부의 뜻대로 수행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모든 그리스도의 구원을 적용하면서 구원의 완성을 위해 사역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세상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연결했으며 오늘도 성도들과 함께한다.
사람의 영과 혼이 분리되지 않듯이 하나님과 성령도 분리되지 않고 항상 연결된다.

B. 사람의 육체와 예수와의 비교

1)우리의 육체
우리의 육체는 혼이 영의 뜻대로 일하는데로 순종하면서 일한다.
우리의 육체는 영을 위해서 최종적인 일을 수행하는 일을 감당한다.
우리의 육체는 스스로 일하지 않고 혼을 통해서 영의 뜻대로 일한다.

2)예수의 육체
예수는 육체로 오셨다. 성부와 성령은 영으로 존재하지만 그는 육체를 입으셨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기 위해서 성령을 힘입어서 일한 것이다.
예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최종적으로 성취하기 위해서 육체로 죽으셨다.
예수는 세상에서 부활하여 성부의 구원의 표적이 되었다. 보이는 표적이 된 것이다.

C. 다음은 영혼과 성부와 성령과의 비교

1)우리의 영혼
영혼은 육체라는 세상의 집을 가지고 있다.
영혼은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이다.
영혼은 한 가지 각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영혼은 집이라는 처소를 얻기 위해서 일한다.
영혼이 바람은 세상에서 육체를 입고 부활하는 목적이 최종적이다.

2)성부와 성령
성부와 성령은 하늘과 땅 모든 세계에서 다스리는 자이다.
성부와 성령은 결코 분리되지 않고 하나이다.
성부와 성령은 한 가지 각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성부와 성령은 세계를 통일시키기 위해서 오늘도 변함없이 일한다.
성부와 성령은 세계의 통일을 위해서 이 땅에 그리스도가 오는 목적으로 일한다.

D.(영혼과 육체)와 (성부와 성령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비교

영혼과 육체는 분리 되었다. 이와 같이 성부와 성령으로부터 예수는 분리되어 사람이 되심.
1)성부는 사람의 영으로 지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며
2)성령은 사람의 혼에 힘을 주시고 올리는 역할을 감당하고
3)예수는 사람이 육체의 기간에 지은 죄를 위해서 희생하고 육체를 살리는 부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친히 무덤을 열어 음부의 권세를 깨뜨리고 사망을 이기셨다.

50) 예수의 인자와 신자의 신분

예수는 세상에 처음 오실 때에는 인자와 신자의 두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인자의 신분은 마리아의 아들로써 그리고 유대인의 신분이며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와 해당된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의 신분인 인자의 신분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신자의 신분은 하나님과 관계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된 것을 말한다. 이 신분은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을 위한 유일성을 가진다. 그가 죽고 살아남으로 인자의 신분은 사라지지만 신자의 신분만 남게 된 것이다.

인자의 신분으로써 그는 유대인의 전 과정을 복습하면서 걸어간다.
모세와 같은 출생-광야의 40년과 같은 40일 세례-광야에서 백성들을 먹이심과 같은 오병이어의 기적들-가나안 전투와 같은 제자들 파송-예루살렘 입성으로 이스라엘의 왕 등극-그리고 죽음까지 그는 유대인들의 역사적 전 과정을 밟아간 것과 같이 나타난다. 예수가 인자의 신분으로써 십자가에 죽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과 같다.

신자의 신분으로써 그는 사탄과의 영적인 전투를 하게 된다.
예수가 태어나자 사탄이 그를 죽이려고 함-사탄이 있는 광야 같은 세상의 시험에서 40일 금식 후 승리-사탄에게 억매인 자들을 위해서 병을 고치심-그는 사탄의 권세아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일시적으로 고통을 당하나 영원히 부활함으로 사탄의 권세를 이기셨다.

그리고 그의 나라를 세상에 성령으로 도래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승리이다. 참 신분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이라는 것이다.(사람의 아들은 임시적)

51) 사도시대와 속사도 시대를 거치면서 교부시대로 넘어간다.

*교부시대는 1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0)예수: 교회를 창설한다.
1)사도: 교회의 기초를 세운다.
2)속사도: 사도들 안에서 사도를 도와서 일했다(디모데, 디도, 빌립 등등).
3)속사도 교부: 사도와 속사도의 직간접 제자들이 될 수 있다.(클레맨트, 폴리캅 등등)
4)속사도 교부들에 의해서 지역을 감독하는 감독이라는 교부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이 관계는 마치 사람에서 사람으로 세워지는 원리가 적용된다.

1)예수와 함께한 사도가 교회의 감독으로 처음 출발한다.
2)사도와 함께한 속사도(교부)들이 교회의 감독이었다. 큰 지역을 담당한 자들이다.
3)예수와 함께한 속사도(교부)의 제자들이 지역교회의 감독으로 나타난다(도시지역 감독)
4)속사도와 함께했던 감독(교부)들은 자신의 제자를 세워서 감독(교부)으로 삼았다.

이렇게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 출발은 예수와 사도로 처음 출발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분명히 증거 되고 있는 사실이다. 1세기를 거쳐서 2세기에 감독정치를 정착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도와 속사도가 사라져가면서 그들을 대신하여 지역을 감독하는 감독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한 계승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성직의 계승으로 보이지만 믿음의 계승된 것이다. 믿음에 의해서 감독이 자신을 대신하는 감독을 세웠던 것이다.

이렇게 1, 2, 3세기로 이어지는 교회의 감독(교부)이 진정한 교회의 감독정치였던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원리로 이어진 것이며 안수 받은 자가 다른 이에게 안수하여 세운원리이다. 사도가 안수하여 속 사도를 파송하였듯이 감독도 자신이 안수 받아 취한 감독직을 다음사람에게 전수했던 것과 같다. 이것은 혈통으로 전가되는 것보다 안수에서 안수로 전가되는 믿음의 원리가 적용된 것이다. 감독이 감독을 세운다는 것이 이러한 원리 때문이었다.

이렇게 초대교회는 지역의 수장과 같은 자들이 분명히 있었다.
심지어 예수살렘 유대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수장과 같은 감독의 역할을 한 자가 혈통으로 나타난다. 아래의 내용이 이를 이증하고 있다.

*[관련 글]*
초대 교부 헤게쉽의 글에 의하면 (대략 180년 경 이 글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인용됨 교회사 3,11) 야고보의 처형이후 예수의 친척인 클로파스의 아들 시몬이 그 뒤를 이어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 된다.

이렇게 2세기에는 거의 수장과 같은 지역을 대표하는 막강한 감독이 있었다는 것은 사도의 역할과 같이 그 감독들도 그렇게 사도적인 계승을 주장하면서 일하게 된 것이다.
초대교회에 장로(감독)와 집사만 거론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속사도라는 감독이 있었고 그들의 제자들이 그 위치를 얻게 된다. 그리고 지역 안에 있는 여러 장로들은 그러한 자들을 지역교회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여기에 된 것이다.

결국 사도와 속사도로 운영되는 1세기의 정치가 1세기에서 2세기로 넘어가면서 감독과 장로와 집사로 운영되는 체계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사도적인 계승이다.
사도(속사도)와 장로와 집사에서 감독과 장로와 집사로 이어지게 된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52) 중생이란?

중생은 예수의 죽음과 함께 죽고 장사지냄으로 함께 일으킴을 얻는 영적사건이다.
소명으로 부름을 받는 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 하나님의 생명이 중생된 자이다. 이러한 자들은 영적으로 세상과 사탄을 떠난 자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구별된 광야에 있는 교회가 된 것이다.

*구별된 중생된 자의 영적인 상태

  [예수와 함께 죽음]================[예수와 함께 부활]
  육신이 성령으로 함께 죽음***************내영이 성령으로 함께 부활
  죄의 종에서 벗어나*************************의의 종이 됨
   육신으로는 죄인***************************영으로는 의인
  육신으로는 죽은 자*************************성령으로는 산영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의와 생명의 법에서 자유
 죄와 의가 육신에 있게 된다.**************성령으로 내영은 의를 따라간다.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따른다.*************성령으로는 의의 법을 따라간다.
겉 사람은 죄와 율법아래 있다.************속사람은 의와 생명의 법에 있다.

이렇게 로마서의 중생된 자의 상태는 이미 중생된 자를 두고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죽은 자는 예수와 함께 산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성도들은 이렇게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동시에 그렇게 죽은 자는 육신을 쫓거나 육신을 주장하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죽은 자들은 분명하게도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아야 마땅하다.

만약에 영적으로 예수와 함께 죽은 자가 의의 종으로 살지 않고 여전히 죄의 종으로 계속 살아가게 된다면 그는 생명으로 인도되지 못할 것이고 그의 영혼은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께 인도되지 못할 것이다.

53) 각종 절기를 지키는 것은 율법적인 신앙이다.

성탄절: 아기 예수 숭배사상이다. 카톨릭의 유산물이며 인본주의에 의한 사상이다.
부활절: 부활절을 지키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부활을 기념하라는 것도 성경적 근거도 없다.
추수감사절: 구약절기 사상에 기초하며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이지 기념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절기들은 신약사상이 아닌 구약사상에 기초한 것이며 특히 인본주의 사상이다.



54) 우리 안에는 두 가지 영적인 싸움이 있다.

하나는 성령의 소욕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육신의 소욕이다.
이렇게 우리 안에는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있는 내적인 영적 전투상태이다.
영혼이 성령을 따라서 순종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육신을 따라서 살면 육신의 열매인 죄의 열매를 맺게 된다. 우리의 영혼은 중생으로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중생으로 이미 의의 종이 되었으며 의의 종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한 자가 죄를 따라서 죄의 종으로 살아간다면 안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의의 종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완전히 죄를 따라서 살지 않는 다는 것도 아니다. 혹시 범죄 하더라도 그는 죄 사함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의의 종이 죄의 종과 같이 항상 살아간다면 그는 육신과 함께 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쫓아서 살아야 한다.

우리의 영이 육신의 죄를 따라서 산다면 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영이 성령을 따라서 산다면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 반드시 인도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육신으로는 죄인이며 우리의 영으로는 하나님께 대하여 의인이라는 것이다. 중생으로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이다. 동시에 육신의 죄와는 원수의 관계가 된 것이다.

이렇게 구별된 것은 이미 예수와 함께 영적으로 우리의 육체가 십자가에 죽은 것이며 또한 예수와 함께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은 이미 의인의 영이다. 그러한 의인의 영은 여전히 죄인의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죄를 지을 수 있다.

혹시 자신의 영도 모르게 짓게 되는 육신의 죄로 말미암는 우발적인 죄는 자신의 영과 상관없으므로 용서를 받는 문제가 아니지만 내 영이 육신을 따라서 자범죄를 지었다면 그 영은 깨끗함을 얻기 위해서 죄를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된다. 이렇게 지금 살아서 두루마리를 빠는 자들이 성도들이다.

영적인 중생의 사건으로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소유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영이 육신을 통해서 짓는 모든 자범죄는 회개해야한다. 반면에 우리 육신의 죄로 말미암아 죄가 드러난다면 이것은 내 영의 것이 아닌 죄의 것이 된다.

결론으로 중생으로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영적으로 분리되었다.
내 영은 하나님의 것으로 성령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 반면에 내 육신은 여전히 죄가 있는 것이다. 육신을 쫓는 자들은 이렇게 육신과 함께 망한다. 그러나 내 영이 혼을 통해서 성령을 쫓아서 살게 된다면 우리의 살아있는 몸을 하나님의 것으로 사용하게 될 것이다.

내 영이 혼을 통해서 성령을 쫓아서 살게 된다면 그 영혼은 성령으로 인도 받게 된다.
내 영이 육신과 육신의 죄를 쫓아서 산다면 그는 육신과 함께 영혼이 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영이 육신으로부터 출발된 죄를 따라서 죄의 종으로 산다면 반드시 망하지만 우리의 영이 성령을 쫓아서 산다면 혼을 통해서 몸을 복종하게 하여 의의 병기로 사용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은 육신의 죄를 따라서 사는 자가 아닌 육신 안에 성령을 쫓아서 사는 자이다. 성령을 쫓아 사는 자는 자기 육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될 것이다.

55) 영혼과 육체로 분리하는 것과 달리 영과 육신으로 분리하는 또 다른 이해

로마서에서 바울은 영혼과 육체로 분리하는 이해보다는 영과 육신으로 보통 이해하고 있다.
영은 마음이나 속사람으로 육신은 몸과 겉 사람으로 각각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영혼과 육체로 분리되는 것은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실재적인 분리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영혼과 육체로 분리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영적 중생으로 이해할 때는 영혼과 육체로 분리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오직 영적인 이해이다.

이러한 영적인 중생은 영적으로 우리의 육체가 예수와 함께 죽고 그의 영혼이 살림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들은 실재적으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살아있는 우리의 육신의 요소는 혼과 육에 해당될 것이다.
이렇게 영을 제외하고서 육신으로 표현할 때는 육체와 그 육체를 살리는 혼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서 말할 수는 있지만 영혼과 육신으로 나누어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육신은 단순한 육체자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혼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육신과 육체자체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영혼과 육체로 구분하였듯이 또한 영과 육신으로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내 영은 혼과 함께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육신하면 영을 포함시키는 것이 아니다.
육신하면 육체를 가리키면서 살아있는 육신 즉 혼으로 살아있는 육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육신에는 원죄가 있다는 것이다.
육신을 신뢰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육신에 죄가 있고 그 육신은 하나님을 거역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육신 안에 성령이 오셨다. 즉 육신의 죄와 싸우려는 의의 성령이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으로 나누어진다. 육신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슬리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한다는 것은 우리의 몸이라는 육신 안에 내주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살아있는 육신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과 성령으로 구분되어진다.

그리고 우리의 영은 육신을 따라서 사는 자가 아닌 성령을 쫓아서 사는 자가 된 것이다.
성령을 쫓아서 산다는 것은 우리의 영이 성령의 소욕을 쫓아서 살아가게 된다면 그의 영은 육신을 살렸던 혼과 함께 성령에 의해서 그의 영혼이 하나님께 인도될 것이다. 육과 함께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불신자들과 같이 육신에 성령이 없는 자들은 그의 영이 육신만을 쫓아서 살아가게 되어있다. 또 육신 안에 성령이 없으므로 죄 사함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는 육체가 흙으로 가는 동시에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서 음부로 들어간다. 이렇게 육신만을 따라가는 자는 불신자들은 결국 망하게 되는 영혼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이 성령을 쫓아서 살아가게 된다면 그는 자신의 몸을 복종시키고 의의 병기와 성령의 전으로 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내적으로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런 영은 육신 중에서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육체를 살렸던 혼과 함께 그의 영혼이 성령으로 인도되어 하늘에 오르게 될 것이다.

56) 귀신론에 반박하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는 논리는 비성경적이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분리된다. 귀신은 영으로 존재한다.
영혼은 영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최후의 심판할 때도 영혼과 육체로 심판된다.

만약에 사람이 죽어서 영으로 있다면 혼이 없기에 즉 영혼이 아니기에 이미 영원한 심판이 된 것이다. 영혼이 있어야 육체를 얻는다. 성경은 모든 자들이 부활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죽은 영혼들이 모두 육체를 입고 살아난다는 것이다. 죽은 영혼은 이 세상에 없다. 그 영혼은 낙원이 아니면 음부에 갇힌다. 예수도 죽으실 때에 그의 영혼이 낙원에 오르셨다.

귀신은 성경에서 일관적으로 영으로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 귀신은 영원히 저주된 것이다. 영으로만 있는 자들의 심판은 영원한 저주일 뿐이다.
사람만이 기회가 주어진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의 육체적 죽음으로 우리는 육체의 기간에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귀신이 구원받는 다는 내용이 성경에 전무하다. 사탄과 귀신들은 저주된 영이다. 오직 심판으로 불 못에 던져질 것이다.

57) 예수는 죽을 수 있는 육체로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는 죄는 없지만 그의 육체는 죽을 수 있는 육체라는 것이다.
그는 피곤함을 느꼈다. 울기도 하였다. 고통을 느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죄인들과 같은 몸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완전한 육체로 부활한 것이다. 이 몸은 죽을 수 없는 완전한 몸이다. 우리도 예수로 말미암아 현재의 육체를 벗고 완전한 부활체를 얻는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것은 예수가 마리아의 몸으로 왔던 그 몸도 해당된다.
부활체는 늙거나 자라거나 혹은 그런 성장의 과정이 없다. 이 세상에 예수는 성장의 과정을 걸어갔다. 이것은 그가 우리와 같은 죽음으로 달려가는 육체를 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죄가 없다고 그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일방적이 생각이다.
예수는 처음부터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셨고 우리와 같은 경험을 가지셨다.
그리고 그는 그런 육체를 통과해서 영원한 육체를 얻은 것이다. 이 세상에 와서 이 세상 안에서 영원한 부활을 얻은 자는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그 몸은 이 세상에 있는 몸이 아니다.

그의 몸은 장차 오는 세계에 해당되는 것이다. 죄가 있고 변형되는 이 곳에 그가 계셔야 되는 몸이 아닌 것이다. 그 몸에 합당하게 재림으로 오는 세계에 거할 부활의 몸이다. 우리도 이 곳을 벗어나면 이 세상이 아닌 오는 재림의 세계를 기다린다. 물론 우리의 몸도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 몸이 거할 곳은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이다.

58) 예수의 동정녀 마리아 잉태는 원죄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보통 남자와 여자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은 이 땅에 태어난다.
이러한 원리는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는 방식에 의해서 모든 인류는 이 땅에 죄의 오염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자들에게 원죄가 따라오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방식과 달리 예수는 세상에 올 때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온 것이다.
그는 원죄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의 씨였으며 그 씨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다. 이렇게 잉태됨으로 생육하는 방식으로 전가된 원죄의 방식을 피하게 된 것이다. 모든 인류와 다른 방식으로 죄의 오염에서 벗어난 것이다.

또한 그는 원죄와 상관이 없었고 동시에 자범죄도 짓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에 의해서 땅에서 온 자가 아닌 하늘에서 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세상에 오셨던 결정적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은 원죄에 의해서 타락하지만 그러한 방식을 피하고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인 씨가 이 땅에 심겨진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난 자가 예수라는 사실이다. 그 예수는 인류의 구세주가 된다.

59)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구분 어떻게 해야 하나?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구분은 엄밀히 말하면 예수의 초림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세례요한도 구약시대의 선지자였다. 예수가 사역하는 과정은 구약시대라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출발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를 말할 수 있다. 예수가 부활한 이후부터 새로운 시대가 된 것이다. 예수가 부활하자 그 안에는 성령이 있었다.

부활한 예수는 과거 구약시대의 신분인 유대인의 신분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만 부활한 것이다. 그러므로 새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왕으로 부활한 것이며 백성들을 그 때부터 모으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백성들을 온 세상에서 그리고 지구가 끝나는 날까지 구원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그가 올라가시고 성령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이렇게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구분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시작된 것이다. 특히 그의 죽음은 모든 유대인의 것들과 단절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활은 새롭게 출발하게 된 출발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시대를 초림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60)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성령에 대한 역사는 다르다.

구약시대의 성령과 신약의 성령의 이해는 달라야 한다.
구약시대에서 활동한 성령의 역사는 신약시대의 성령의 역사와 다른 면이 있다.

구약시대의 성령은 사람 안에 내주하여 역사한 것이 아니다.
신약시대의 성령은 사람 안에 내주하여 역사한 것이 되었다.

구약시대의 성령은 사람 안에 머물면서 역사한 것이 아니다. 외적인 역사도 있으며 물론 내적인 역사도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역사도 있으며 외적으로 기적을 일으킨 역사도 있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역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원한 구원을 약속받는 보증으로서 성령이 내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성령은 사람 안에 머물면서 역사한 것이 되었다. 예수가 먼저 성령을 그가 받으시고 그 받으신 성령을 우리들에게 부어주게 된 것이다. 이렇게 구원의 보증이요 사람들 안에서 활동한 성령시대가 신약시대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가장 큰 자라고 칭찬했던 요한보다 신약시대 사람들이 더 행복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바라보는 믿음으로 약속만 받았다면 신약시대 사람들은 예수가 이룬 구원을 통해서 실재적으로 죄 사함을 얻고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구원을 현재 얻은 것이 된다. 동시에 장차 낙원에 죽으며 즉시 올라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성령의 역사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런데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구분하지 않으면 마치 구약시대에도 성도들 안에 성령이 내주하였고 신약에서 그렇다고 동일하게 이해하는 오류가 나타난다. 분명한 것은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 역사한 성령은 완전히 내주하여 역사한 것이 아니다. 또 구약시대의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을 하나님의 신으로 불린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구약시대의 성도와 달리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요단강에서 받은 성령을 그가 의를 이루고 부활 승천함으로 우리들에게도 선물로 주시게 된 것이다. 이런 차이는 약속과 성취 그림자와 실체와 같은 차이가 있듯이 신약시대와 구약시대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으로 일한 것이다. 그러나 외적이며 혹은 내적으로도 일하지만 신약시대와 같이 온전히 머물면서 역사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61) 예수는 연약한 육신을 초월하지 않는 사람으로 존재했었다.

아기 예수는 아기의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아기였는데 초월적인 신적인 능력을 스스로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그는 연약한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 예수의 영도 어린 육신 안에서 지배를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점점 자라나자 그 영혼은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나가게 된 것이다.

물론 아기였던 예수의 영혼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자나나면서 성령에 의해서 하늘의 이치를 깊이 알게 되었고 그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라나는 예수는 성령에 의해서 자신이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서 하나님의 뜻대로 일한 것이다.
자신의 뜻대로 일한 것이 아닌 성령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걸어간 것이 공생애의 길이다. 그는 성령으로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고 그 길을 포기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한 이후 그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귀신을 쫓아내고 하늘의 말씀을 전하게 된다. 물론 그 자신이 독자적으로 깨달아 말씀을 전한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그는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전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그의 일은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성령으로 알고 순종했던 자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가르침을 예수 자신도 이 땅에서 받았으며 성령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뜻과 요구에 대해서 기도를 드린 것이다.

물론 예수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예수 자신의 뜻은 할 수만 있거든 이 고통의 십자가를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그 길을 요구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길 간구하면서 순종했던 것이다. 그는 성령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밝히 알게 되었고 또 예언했던 것이다.

예수는 육신을 초월하지 않으셨다.
그가 스스로 육신을 초월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철저히 그는 사람들과 같이 연약한 육체였다. 그가 스스로 귀신을 쫓아낼 능력도 없었다.
연약한 육신 안에서의 질서를 그는 모두 순종하였던 것이다. 모든 기적과 이적 그리고 능력은 자신 안에서 온 것이 아닌 하늘에서 즉 성령을 힘입어서 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그 육신을 초월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지셨다.
그는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고통을 감수하지 않았다.
육신자체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면서 서서히 죽어간 것이다. 이렇게 예수는 사람으로서 산 것이다. 그가 귀신을 쫓아내고 하늘의 이치를 설명하려면 그는 하늘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것은 성령을 받아서 행해야 되는 문제였다. 그래서 요단강에서 그는 성령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연약한 육체를 가진 예수를 성부 하나님과 동등의 능력인 초월적인 자였다면 그는 육체의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임한 것이다. 그가 임하였고 또한 그는 성령을 받았다.

이렇게 그는 사람으로서 성령을 받아서 일했던 것이다. 물론 사람이지만 사람이 되기 전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은 그의 위치가 우리와 같은 자가 아닌 신성을 가지신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며 특히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그를 성부와 동등으로만 생각하고 주장한다면 그가 연약한 육체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을 간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62) 예수는 과연 메시야가 분명한가?

예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유일한 메시야였다.
그 메시야의 공식적인 출발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시작된다.
구약시대에는 기름부음으로 왕이 세워졌으나 예수는 성령이 그 위에 비둘기 같이 임하심으로 메시야로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부터 매시야적 사명을 감당하게 되셨던 것이다.

그는 먼저 시험을 받으셨다.
사람들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메시야로써 사탄의 시험을 온전히 이기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먼저 선지자와 같이 일하신다.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르치시고 먹이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사람들은 그를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칭송한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메시야의 직분을 감당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죽음이다. 그는 대제사장으로 죽으시고 부활한 것이다.
이렇게 예수는 매시야적인 사명을 차례대로 감당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는 모든 과업을 완수하고 하늘로 오르셨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그 대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신다.

63) 여자의 후손인 예수

사탄이 화와를 미혹함으로 죄를 짓게 되었고 아담이 그 후에 죄를 짓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과 사탄이 대립할 것을 예언하는 내용이 창세기 3장 15절이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 예수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그는 화와의 후손으로 마리아라는 여자에 의해서 잉태된 것이다.
이는 그가 여자의 후손이 되었다는 것을 이루는 역사적인 성취인 것이다.

하와로 출발한 죄의 출발로 아담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하와의 후손인 동시에 모든 여자의 후손인 예수는 여자 마리아라는 한 처녀에 의해서 잉태된 것이다. 이는 결국 예수가 하늘에서 세상에 왔던 것은 아담과 같은 둘째 아담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결국 둘째 아담인 예수로 구원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 하와로 출발한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아담이라는 씨 곧 정자와 난자의 방법으로 이 세상에 사람들이 오게 된 것이다. 즉 남자와 여자에 의해서 모든 사람의 죄의 육체를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죄와 상관없는 방법으로 오셨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오는 남자와 여자의 방법으로 오지 않고 여자의 몸만 취해서 왔다는 사실이다. 즉 아담의 씨라는 남자의 씨로 세상에 온 인류와 달리 그는 아담의 씨와 상관없이 새로운 둘째 아담이 된 씨가 된 것이다. 죄인의 씨에 의해서 죄의 육체를 얻은 것이 아닌 죄와 상관없이 세상에 왔던 것이다.

그는 새로운 하나님의 씨로 세상에 육체를 취한 것이다.
말씀이 마리아의 몸에서 씨가 되었고 그 씨로 잉태하게 된 것이다.
물론 마리아의 몸으로 이 땅에 왔기에 그도 죽는 육체를 가지고 왔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죄와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죽고 부활함으로 죽는 육체에서 영원한 육체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우리도 장차 죽는 육체에서 영원한 육체가 되어 살아날 것이 분명하다. 예수에 의해 모든 육체가 살아난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이 모든 육체를 살리는 대표성을 가진 부활이라는 것이다. 마치 아담으로 모든 육체에 죽음이 왔듯이 예수로 모든 육체가 장차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선악 간에 심판으로 나아갈 것이다.

첫째 아담으로부터는 죄가 처음으로 들어왔다.
둘째 아담으로부터는 의가 처음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성도들은 죄가 있는 동시에 의가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죄와 의의 싸움이 성도 안에서 벌어지게 된 것이다.

성도는 사탄과 죄의 관계가 아닌 예수와 의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과 죄와 싸우는 의와 성령이 있는 것이다.

이 싸움은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 된다는 것이다.
이 싸움이 역사적으로 마치는 때는 예수가 오셔서 이 땅에 사탄을 완전히 물리치고 죄를 끝내는 때이다. 그리고 우리는 의로 말미암아 영원한 하나님의 땅과 하늘에 거하게 된다. (2008년 3월 12일)


64)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에 자의적으로 재해석했는가?

구약성경을 인용한 사복음서를 보면 구약성경의 내용과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신약성경을 기록한 자들이 자의적으로 임으로 해석하였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자의적 해석은 없었다. 물론 유기적인 성령의 감동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활용하였지만 성령의 감동은 구약성경을 재해석한 것이 아닌 그 의미를 정확히 확인시켜주는 것이 되었다.

또한 구약의 그림자에 대한 신약에서의 실체적 적용은 신약성경 저자의 자의적인 재해석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구약성경을 기록한 저자가 사람이었지만 그 기록에 직접 관여하신 분은 하나님의 성령이시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된 것이다. 그런 관계로 구약성경에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에 관계된 것들로 가득차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약성경의 내용을 신약의 기자가 취하여 인용했던 것을 구약성경에 대한 자의적인 재해석으로 보는 것과 구약성경의 그림자에 대한 성령의 감동으로 구약기사에 대한 실체적인 재해석으로 이해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동일하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과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서로 밀접한 그림자와 실체로 이해하려는 것을 간과하면 결국 신약 저자의 재해석만이 더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믿음은 구약성경을 그림자적인 것들을 보게 하고 신약성경을 실체로 확인하게 한다. 물론 구약성경 전체가 모두 그림자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질 내용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얻는 것은 구약성경을 약속과 그림자 그리고 예표적인 사건과 인물로 보는 것이 필요하며 신약은 성취와 실체 그리고 예표에 대한 실제적인 사건과 인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65) 교파와 교단 등 교회의 분열은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누어지는 교회가 아니다.
교파와 교단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스스로 몸을 나누는 범죄이다.
이런 것은 사람들이 임으로 만든 것으로 성경에서 결코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다.

신종 율법주의적인 교회의 유전이며 전통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 교회는 개혁을 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에서 얼마든지 지지하는 일이다. 이단이 아닌 이상 무조건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66) 작은 교회는 평일 날 중심으로 모이고 대형교회는 일요일 날 중심으로 모여야 한다.

한 동네에서 작은 교회와 대형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작은 교회의 규모를 일정한 규모와 교인들로 모이게 해야 한다. 대형교회는 평일에는 작은 교회에 모이도록 교인들을 가까운 구역교회에 보내어야 한다.(개척교회나 작은 교회) 그리고 작은 교회는 주일 날 만큼은 한 동네가 모두 모일 수 있는 대형교회로 모여야 한다.

교인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지금과 같은 소유적인 교회와 이기적인 교회는 성경에서 지지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한 동네에 있는 모든 교회가 하나로 모일 수 있는 구조로 나타나야 한다. 그것은 작은 교회도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추게 해야 한다. 일정한 숫자가 되게 한다.

그럼 모든 교회의 공동체들이 건강하고 튼튼해질 것이다.

(2007년 6월 29일 김인찬 목사) 주소: http://cafe.daum.net/hosanna

글쓴이

대신교회

날짜

2008-03-26 12:3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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