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행함 없는 믿음' 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



어떤 분이 저에게 "행위구원론자가 아니냐"

그리고 제 글에 이단사상을 얘기하셔서 쓴 답글입니다.



마지막 답글입니다.

더 이상 쓰는 것은 무의미하겠죠.

서로가 성경을 보는 견해가 다르기에 수평선과도 같은 것 같습니다.

 

오늘날 잘못된 믿음에 관해서 구원관에 관해서

그리고 신앙인의 자세인 침노에 관해서 말하면 

왜 그것이 이단사상이나 행위구원론이나

공로주의 같은 황당한 말들로 몰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님께서 

두 가지 질문을 먼저 주셨네요.

 

삼위일체를 인정하느냐

제 홈피에 성령에 관한 글이 없어서 그러신다고 하셨네요.

제 홈피에 계속 반복되어 나오는 노래3곡 중에 1곡이 “성령이 오셨네”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누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까?



너무 당연한 얘기가 제 글속에 성령에 관한 얘기가 없다고

삼위일체를 인정하느냐 라는 질문은 제가 지금껏 살면서

생전 처음받아보는 아주 재미있는(?) 질문이네요.




그리고 십자가의 우편강도에 대해서 답변해 달라고 하셨죠.

보통 우편강도를 말하면서 믿음을 가지면 즉각적 구원의 완성이 되며

오직 믿음으로 즉각적이며 완성적 구원을 받는다 라고 말합니다.



말 그대로는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만난 시간들을 본다면(상황적인 시간을 볼때 짧은 시간)

죽음 직전임에도 그에게 주님의 구원의 손길이 미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주님을 향한 믿음이 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겠죠.

하지만 이 우편강도의 대해서 간과해서는 안되는게 있습니다.



우편강도에게 동반된 것은

은혜와 더불어 진실한 회개 였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는 우편강도에 대해서 아주 짧게 나와있습니다.

배경적으로 또는 심정적으로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표현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전체적으로 말하는 구원에 비추어 본다면

그리고 그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해 보아도 충분히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편강도가 어떻게 그리고 무슨죄를 지었는지를 알 수 없지만

그가 죄를 짓고 감옥에 있으면서 자기내면의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던 시간이

십자가를 지기전에 감옥에서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유대인으로서 그 죄들을 하나님께 어떻게 빌어야 할지를...

깊이 고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시대에 이스라엘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당연히 없었겠지요?

(공생애 3년을 마치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감옥 속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메시야, 구원자 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혹 나같은 죄인에게도 빌길을 주실까... 라는

참회의 마음 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바로 회개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빌길을 얻어야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마음만은 절실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만났을 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며

나를 기억해 달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칠 수 있었던 것,

이런 진실한 회개의 준비 가 있었기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저주한 다른 강도와의 차이점이었죠.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 믿음은 자신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빌길을 주시는

주님을 소중히 하며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그 믿음입니다.



은혜는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구원의 수단이지만,

그 은혜 가운데서 늘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시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늘 하시는 일이신 것입니다.



늘 중심을 보신다라고 성경은 계속 반복해서 말합니다.

긍흘히 여김받을 참 죄인의 심정 이라면 그 마음을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전에 글에서도 말 한것처럼


믿음이라는 것이 "안다"" 인지한다""지적인 동의"를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닌 생각, 계산(믿어주어야 천국을 가니까)이며 종교심리인 것입니다.

 

계속 말하지만 믿음은 단순히 “안다“ 라는 개념이 절대 아닙니다


믿음은 분명하면서도 전체적이며 포괄적입니다.

믿음은 삶이며 진정성의 증거이며 믿음은 결국 사랑인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을 현실화 시킬수 있는 아주 강력한 에너지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믿음이기에 진정 주님을 믿기에 신앙의 과정을 이루어 나가서

장성한 분량까지 나아가는 것이 참 믿음이며 믿음의 실체입니다.

 

저는 율법적인 행위로 구원 받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십일조, 각종헌금, 주일성수, 교회봉사를 한다고

그것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행위도 아니며,

또한 그것이 믿음의 증거나 믿음 그 자체도 아닐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이 없다면 그저 습관과 의무감으로 한다면

그것은 가식이며 오히려 불의가 될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중심을 보시기에...

 

사람이 아무리 선량한 행위를 해도 구원에 이를수 없음을

저도 당연히... 매우 당연히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그 누가 구원에 이를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은 바로 시작이자, 기회이며

과정을 제대로 밟아나갔을 때의 결과로써 말 할수 있는 것입니다.



시작과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결코 완성이 아닙니다.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시작과 기회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씨뿌리는 비유(마13장)를 생각해 봅시다.

좋은 땅에 뿌리워진 씨는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길가, 돌밭,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는 전혀 결실치 못했습니다.



그 씨를 가지고 말라비틀어져서 보일락 말락한 그 씨

(감동없는, 강팍한, 메마른, 습관적인, 은혜받았던 옛기억만 있는,

다른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치 못하는)를 가지고

"오직 믿음(인지적)으로 구원받았다"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과연 주님의 마음이 어떠실까요?



믿음이 믿음이 되지 못한 그 얄팍한 심리로 말한다는게 가증스럽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을 향해서는

엄청나게 진노하시고 계속적으로 경고하셨습니다.


화있을찐저 외식하는 자들아,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도끼로 찍어서 불에 던진다 라구요...



사랑의 주님이시니까 그저 마냥 봐줄거라는 것은

본인의 정적인기준이며, 본인의 기대심리일 뿐입니다.

 

바리새인은 무엇입니까?

마음의 감동없이 행동만 하는 종교주의자들이겠죠.

그런 모습이 말라비틀어진 씨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는 말라죽게 저주하시거나

도끼로 찍어서 불어던진다고 하셨습니다.

메마름으로... 앙상함으로... 말라 죽어가고 있는 나무가


오직 믿음(인지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아무리 앵무새처럼 반복해 보았자

그것이 무슨 믿음이며 무슨 구원이 그에게 해당되겠습니까?

 

여기서 히브리서에 나오는 말씀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히브리서4장1,2절)

 

복음이란 주님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갈 약속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로마서를 살펴보면) 약간의 부연설명을 하자면

의인(로마서3장-의롭다 하심)이라 칭함을 받는 것은 의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의인처럼 살도록 노력해라 라는 하나님의 주문인 것입니다.

말 그대로 칭함인 것입니다.



진행형 으로 이해하시면 쉽겠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설명해 주는 미래에 대한 주문일 것입니다.



하나 더 살펴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장 10절)



그래서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씀 역시

마음으로 믿는다 라는게 사고적인“안다” 가 아니라

마음이 움직여지는 감동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또한 삶일 것입니다.



그리고 의에 이른다는 것은 실질적인 성화인 것입니다

이런 부분들이 다 되어서 그것을 입으로 시인했을 때

비로소 그때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메마른 마음으로 성경구절만 말한다고 절대로 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위에 히브리서 말씀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천국에 갈 약속을 처음 은혜받았을 때

받는다해도 그것은 기회가 주어진 것이지 완성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짐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위에 히브리서 말씀처럼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아도 못들어가는 경우가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구절에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줍니다.



천국에 못들어가는 그 이유가 복음을 들었지만

듣는 자의 믿음이 화합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화합지 못했다...


바로 우편강도가 화합한 믿음의 예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합은 무엇입니까?

긍흘히 여김을 받을 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바로 '회개'의 모습입니다.

 

성경을 안다고 말하나 교회를 오래다녔다고 말하나

삶의 열매가 없고, 사랑의 열매가 없는데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전혀 화합치 못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믿음을 화합한 모습인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화합하지 못했다"라면 그것은 자신의 삶과 영혼에 너무나 비참한 일일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헛되이하는, 그 십자가를 삶으로 부인하는 삶일 것입니다.



정말 십자가를 믿는다면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모진 고문과 수치를 받으시면서 돌아가신 그 주님이

내 가슴에 처절하게 맺힌다면 어떻게 내 삶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믿는다'라고 말하나 믿지 못하는 진정성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천국을 믿는다 하나 강남아파트의 시세에 더 관심이 있다면

그것이 믿되 믿지 못하는 증거일 것입니다.

매달 통장으로 들어오는 월급통장을 더 믿고 신뢰하면서

오직 하나님만 믿는다고 말만하는 자신을 속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재미있는 얘기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신학대학원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학생들은 예수님을 믿는가?

바울을 믿는가?

학생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으면 천국간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왜 바울의 말을 믿냐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이 얘기를 하는 것은 복음서가 바울서신서보다

더 성경적으로 권위가 있다 라는 얘기를 하려는게 아닙니다.

뼈있는 얘기라 생각해 볼 얘기라 적어본 것입니다.



생각해 볼 부분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는, 사도 바울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썼었던 간략한 표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물론 그 말씀들이 부족하다, 모자라다 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바울과 제자들이 전한 "예수님을 믿으라" 라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와 그분의 삶과 그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라는 것으로

당연히 귀결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시작된다는 표현들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으면 천국간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복음서에도 그런 맥략의

비슷한 구절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한복음 3장16절)”

이 부분은 3장에 거듭남을 지나서 이 말씀의 단락(3장16-21절)에서

주님의 하시는 일, 심판을 주관하시는 일들이 나옵니다.

이런 부분들을 다 연결해서 보아야 그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권세를 지니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십자가와 (당연히 저를 믿기에)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일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는 늘 구절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단락과 장과 권과 전체를 보는 것이 문맥적으로도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4장6절)



주님의 길을 갈때 진리에 이르게 되며

진정한 예수님의 생명력이 그 안에 실제하며 운동력있게 움직일 것입니다.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전혀 가지도 않으면서

"믿으니(인지적) 구원받았고,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얘기들을 하는 것은

그저 자신의 신념이며, 머릿 속에 관념일 뿐입니다.



말씀의 단어만 쏙쏙 골라따는 것입니다

희망사항...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 하나를 더 살펴보려 합니다.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로마서11장6절)

 

6절을 인용하면서 "행위"가 아닌 "오직 은혜"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면

누가 주님을 믿고 천국을 향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대전제적인

은혜 아래 있는 것인데 무엇인들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인용구절을 얘기할 때 위에서 얘기했듯이

단락과 장을 연결하여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절만 인용하기에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며 오류에 빠지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를 말하는 이 로마서 11장6절 말씀도

앞구절들을 살펴보면 엘리야가 나 홀로 남았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끊지않는 칠천을 남겨두었다고 하십니다.

 

붙여서 4절에서 6절을 보겠습니다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로마서11장4-6절)




엘리야때처럼 강팍한 시대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의 사람들을 예비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 역시 마찬가지 일테고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일들로도 조명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 생명력 없이 강팍함으로 죽어갈때

은혜를 예비해두신 하나님,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으로도

각자가 이 말씀으로 자신에게 묵상, 적용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6절을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믿음)다"라는 설명보다는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예비하심이라는 측면의

은혜로 설명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믿음에 관하여 하나 더 설명해보려 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브리서11정8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로마서4장3절)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중이었고 오래참음 이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이런 모든 어려움들을 견디고 참은 것이었습니다.

그저 "믿어"라는 말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말한다고 하나님께서 단순히 그 말을 믿어주시겠습니까?




믿음은 히브리서 말씀(11장1절)처럼 바라는 것을

실상으로 만들수 있는 강력하고 실체적인 내면의 힘입니다.



결승점까지 이를 수 있게 하는 그 힘...


믿음에 관한 성경 말씀을 보아도 단락이나 장으로 전체적으로 보지 않으면

너무나 자기가 원하는 단어만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이 오용하는 구절을 하나 더 살펴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장 17절)

 

이 구절을 보면서 늘 자신에게 되물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삶을 나는 과연 살고 있는가?

내가 오직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오직 믿음으로 사는 그 삶이 얼마나 신앙으로 힘있고 강력하며

숭고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겠습니까?

정말 그의 삶이 오직 믿음으로 산다면

늘 주님을 향한 그리움과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나 더 살펴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로마서 1장 21절)

 

중요한 말씀이라 가장 원문에 충실하다는

새표준성경으로 다시 한번 더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21절)

 

이 말씀이 바로 진정한 감사가 없는 머릿속에서만

말로만 머물러 있는 신앙일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는 믿는 자들(로마교회에 쓴 편지)에게 하시는 경고와

돌이키라는 말씀들이 계속 반복되어져서 나옵니다.

 

더 많은 성경 말씀을 적용해 보고 싶고 적용해 보아야 하지만

책이 아니라 까페에 올리는 글이기에 이 정도에서 마무리 하려 합니다.



언제 시간과 기회가 된다면

로마서1장부터 참된 믿음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되짚어 보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봅니다.

 

믿음은

“안다”“인지한다”"지난날 은혜가 기억에 남아있다" 가 아닙니다.

 

"은혜를 받는다"라는 것,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그것은 바로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며,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기에 구원은 늘 진행형이며,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장 12절) 




믿는 사람은 그다지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진짜 믿음이기에 믿음을 발휘하는 삶으로 말하는 것이 믿는 사람일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고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고,

그저 믿음(관념적인 믿음과 종교심리에 가까운)으로 구원받았다 라는



오늘날 말하는 그런 구원관이 얼마나 사람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며

자신의 영혼에무책임하며 철저하게 무력한 신앙으로 만드는지 모릅니다.

지극히 편의주의적인 신앙을 만들 것입니다.




비크리스챤과 크리스챤이 과연 근본적 으로 무엇이 다른가?를

예민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근본적 으로 다르지 않다면 그는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든 천국에 갈테니까요...

이런 구원관이 죽기 전에 "아멘"만 하면 된다는 심리를 정당화시켜 주니까요...



성경에서는 어디를 보아도 늘 깨어있고 근신하라고 말하지만

오늘날 교회들이 내세우는 구원은

전혀 깨어있지 않아도 천국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믿으면 구원이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니까

천국에 대해서 마음을 두거나 그렇게 애쓸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관념적 신앙으로 깨달지 못하고 그저 성경구절만 골라따서

나는 택함받았다 라고 말할뿐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 하셨지만,

오늘날의 구원관은 전혀 침노하지 않아도 당연히 간다는 논리를 폅니다.

이렇게 말하는 교회에 사람들은

마음에 부담을 가지지 않게 되고 출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도 자기 기준에서 괜찮다고 합니다.

그리고 때우기식의 회개를 합니다.

구약에서 늘 선지자들이 말한 처절한 회개,

돌이킴의 회개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시편7:12)






마음을 찢고...



"어차피 천국갈텐데 뭐 힘들게 회개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죠

(요한계시록에서는 회개하라 면서 여러번 반복적으로 엄중한 경고를 보냅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요한계시록3장19절)



적지않은 교회에서는 예배순서에서 당신의 죄를 고백합시다.

(시간이 몇초 흐른 뒤에) 주님께서 사하여 주셨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사람 수에 늘 연연해 하기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비성경적이어도 사람들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게 교회의 본분이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결코, 결단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개념에 대한 정확한 정리와 함께

어떤 구절만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성경을 보는 자세가 항상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죄사함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거니와,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7장47-48절) 새표준성경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함으로 용서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여인이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죠.



왜 믿음으로 사함받았다 라고 하지 않고

그 여인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사함받았다 라고 하는 것일까요?

 

결국 참믿음이란 또한 사랑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라고 반복해서 얘기하지 않으십니다.

늘 하신 얘기가 있습니다.

언제나 늘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늘 말씀하셨다면

우리의 초점도 역시 늘 사랑이 되어야 하는게 마땅치 않겠습니까? 

 

참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사랑으로 말할 것입니다.


이 믿음은 삶이며 숭고함이며 순종이며, 그리하여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성경은 그리고 주님께서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여러번 반복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에 대한 나의 대답은 침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아까 본 히브리서 말씀처럼 화합하지 않는 내가 늘 문제인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수많은 비유를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열처녀 비유(마25장)에서 다섯처녀가 주님을 몰라서 버림을 받습니까?

알아도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뒤늦게 문을 두드렸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그 문을 열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많은 기회를 주시지만

그 기회(기한)가 끝나면 분명한 태도를 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주목해야 합니다.



믿음은... 신앙은...

핑계와 변명으로 종교심리 속에서 반복되는 일상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에게 기다리는 것은

무서운 심판이며 분명한 태도를 취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그 분의 십자가와 말씀들을 믿는데,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정욕을 사랑한다면 그 말로는 너무나 비참할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뿐 실상 그 마음에서 늘 세상에 대해서 연연해 한다면

그것이 바로 가증한 우상이고 무서운 진노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살길은 회개인 것입니다.

믿음이 더욱 믿음되게 회개로 화합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마태복음4장17절)"라는

예수님의 분명한 첫 선포의 말씀처럼


계속 반복적으로 회개하라는 계시록의 말씀처럼

잠깐 감정적으로 눈물뿌리고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는 그런 가짜 회개가 아니라

십자가를 가슴에 묻으면서 하는 처절한 몸부림의 회개입니다.

그런 몸부림이 있다면 어떻게 변화가 없겠습니까?



이 글이 혹 찔림이 되는 분이 계시다면 회개하면 되는 것입니다.

돌이켜 회개하면 그것이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믿음의 화합이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이 가까운 것입니다.



제 글의 요지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 그리고 자신의 믿음이 혹 잘못되었다면

돌이켜 함께 회개하자 는 것입니다.

돌이켜 회개한다면 믿음과 화합하여 온전하 구원에 이를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회개하는 그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고 지혜로운 사람이겠습니까?

단 한분...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그리고 정말 믿음이라면 십자가를 향해서 늘 달려가는 것입니다.

믿음에 관해서 더 설명해야 할 부분이 많이 있음에도

여기서 줄여야 함이 무척 아쉽습니다.



믿음은 결코 "인지"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를수 있는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1장17절) 새표준성경



믿음을 받았다면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은 시작이며 기회이며, 이 말씀처럼 진행형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온전한 믿음에 이를수 있도록 나를 끌고 가는

강력한 영적 에너지와 같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바울과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립보서 3장 12절-13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험해서,

그 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



"거짓 예언자들을 삼가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 열매로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로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마태복음 7장 13-23절) 새표준성경

글쓴이

묵상

날짜

2011-11-08 14: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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